[올레쿤(밤쿤)] 표식 1장 - 01 글상자/└표식(연재중)2016. 8. 6. 23:40
* 밤쿤 (올레쿤) 중심의, 원작세계 기반 서바이벌 스토리입니다.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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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일러스트는 요찌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장. 첫째날
- 01 -
“계속 달려!”
쿤은 소리쳤다. 바닥을 적시며 흥건히 차오르는 물길이 그의 발걸음을 따라 사방으로 튀었다. 찰박찰박 소리가 울릴 법도 했지만 벽을 타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거대한 물길 앞에서 모든 소음이 삼켜져간다. 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얗게 부서지는 물줄기뿐이었다. 지금은 쏟아지는 물의 대부분이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아래쪽의 1, 2층으로 흘러내려가고 있었지만 이런 속도라면 언제 이 방마저 물에 잠겨버릴지 몰랐다.
처음에는 네 개의 하수구를 통해서만 쏟아졌던 물은 점점 갈라진 벽면을 타고서도 새어나오기 시작했고, 그들이 정면의 문을 향해 절반쯤 뛰었을 무렵에는 눈에 닿는 모든 곳에서 콸콸콸 소리를 내며 폭포가 터져 나왔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도 왕난의 시선이 자꾸만 돌아갔다. 쿤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뒤돌아보지 마, 자왕난!”
“하지만……!”
왕난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방금 전까지 함께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비교적 가까이에 있었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도망쳤지만 대부분은 잔뜩 겁에 질려 발을 떼지 못했다. 극한의 공포가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든 탓이었다.
“이봐요들! 멍하니 있지 말고 도망쳐!”
결국 왕난은 다리를 멈췄다.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그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도록 등을 밀어준 뒤 움직였어야 했는데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홀로 와버리고 말았다.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왕난의 목소리에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설 수 있도록 작은 충격을 줘야한다. 왕난의 발길은 망설임 없이 돌아섰지만 강한 손길 하나가 그를 확 잡아끌었다.
“자왕난! 안 돼!”
“방금까지만 해도 함께 이야기하던 사람들이야!”
“언제부터 그렇게 성인군자였지? 네 목숨부터 걱정해!”
“다시 되돌아가서 저 사람들을 데리고 에스컬레이터로 데리고 도망치면 되잖아! 왜 가까운 에스컬레이터를 놔두고 제일 멀리에 있는 문으로 도망가는 거야!”
왕난은 자신의 생각이 비교적 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팔목을 붙든 쿤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지금 이 방에서 가장 위험한 게 바로 저 에스컬레이터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하지만 쿤……!”
“물이 일정 높이 이상 차버리면 저 문이 물의 압력 때문에 열리지 않게 돼! 그럼 그대로 익사라고 알겠어? 쏟아지는 물이 전부 아래층으로 흘러가버려서 고작 발목에서 찰랑찰랑 거리니까 이게 장난인 것 같냐!? 언제까지고 발목 근처를 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지금 되돌아가면 죽는다고! 통과하지 못해도 다음 기회가 있었던 여태까지의 ‘시험’하고는 다르단 말이다!”
동료의 죽음에 민감하다. 동료의 죽음에 필사적이다. 왕난은 쿤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처절함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동료의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그 자신 또한 치가 떨릴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탕수육을 함께 먹고 싶었던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지키고 싶었지만 지키지 못했던 니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아플 만큼 꾹 움켜쥐어오는 쿤의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허둥대는 무리 위에 머물던 왕난의 시선이 확고한 쿤의 눈빛을 따라 움직인다. 쿤이 이끄는 대로, 쿤이 시키는 대로, 그를 따라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한 걸음을 뗀 바로 그 순간에, 왕난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봐버리고 말았다. 멍하니 멈춰있던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왕난!”
생각을 하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큰 의미를 가지고 한 행동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신이 들었을 무렵에 이미 왕난은 달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는 오로지 엘리베이터의 근처에서 고개를 드는 한 소년만이 잡혔다. 넋이 나간 얼굴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앉은 소년은 도대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자왕난!”
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저 소년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얀색을 닮은 회색빛의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둘러매고 있던 보랏빛 목도리는 이미 쏟아지는 물에 젖은 채였다. 니아를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자켓이 보라색이었던가. 주저앉은 소년의 모습에서 니아의 울부짖던 마지막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 꼬마를 버리고 가면 문제없이 방을 탈출 할 수 있다. 쿤의 말대로 물의 압력이 문을 막아버리기 전에 방을 나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소년 하나 구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목숨만 부지한다면 두고두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성인군자라서가 아니었다. 20층에 두고 온 니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왕난은 한참을 달려 소년의 앞에 섰다. 벽면과 가까워 거센 물소리 때문에 크게 외쳐야 겨우 말을 전달할 수 있었다. 쉬지 않고 쏟아지던 물줄기가 벌써 아래층을 꽉 채운 모양이었다. 여태 발목근처에서 머무르던 수위가 급격하게 높아져 무릎을 덮어왔다.젠장, 쿤의 말이 하나도 틀린 적이 없다니까. 소년이 아까보다 더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왕난은 그의 두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뛸 수 있어?”
바들바들 떨리는 눈동자는 황금색에 가까웠다. 짙은 금빛이 저물어가는 태양처럼 흔들리더니 이내 눈물을 굴러 떨어뜨린다. 어둡게 가라앉아 가는 눈동자에 생존을 향한 의지 같은 것은 없어보였지만, 그럼에도 왕난은 가만히 소년을 일으켰다. 친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넘어서기 힘든 고통도 일단 자신의 목숨이 붙어있어야 가질 수 있는 법이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이게 무슨 짓이야?”
뒤 따라 온 쿤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왕난은 거칠게 그를 뿌리쳤다. 쿤이 현명하고 합리적이라는 데는 동의했어도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는 소년의 손을 꽉 붙들며 대꾸했다.
“난 이렇게 어린 아이를 두고서는 가지 않을 거야!”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애를 데리고는 무리야!”
“이렇게 실랑이 할 시간에 달리고 보겠어! 틀려!?”
틀리지 않았다.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고 지금은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왕난에게 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은 살아남은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소년의 눈에 살고자하는 의지가 없었기에 버려두고 싶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었지만, 또한 그 떨리는 눈동자 한 편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서려있었다. 그 두려움이 소년을 움직여주길 바라는 것이 현재에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쿤은 결국 발길을 돌렸다.
“방해가 되면 두고 갈 거야.”
“안 되게 할게!”
왕난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마 밤이라도 그와 같은 행동을 했겠지. 쿤은 왕난의 행동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마냥 비난할 수가 없었다. 밤과 왕난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욕설도 자주하고 시끄러운데다가 제멋대로인 왕난과 비교해서 밤은 고요하고 맑으며 배려심도 깊은 사람이었다. 다만 두 사람의 심연 깊은 곳에 존재하는 순전함만은 닮아있었다. 그것은 쿤이 왕난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세 사람은 다시 정면의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쿤은 한 순간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왕난은 소년의 앞에 서서 뜀박질을 하는 내내 손을 놓지 않았다. 처음에는 엉거주춤하게 끌려가다시피 했던 소년도 시간이 흐르자 점차 제 의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물은 점점 차올라 허리춤을 건드렸지만 아마 그대로 달릴 수 있었다면 방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수압에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도 부술 수 있는 시간 또한 충분했을 터였다.
그러나 쿤과 왕난이 도달하기도 전에, 멀쩡했던 문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날카로운 쇳조각으로 돌변해버린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물속으로 떨어졌고, 고요하던 수면 위에는 거친 파도가 일렁였다. 몰아치는 연기에 쿤과 왕난은 허리를 숙였다. 파편의 일부가 날아와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폭탄이나 어떤 장치가 발동한 것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인 타격이 원인인 듯했다. 쿤의 생각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그 어두운 문의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동작 그만!!”
파도잡이인가. 세 개의 방을 두르고 나타난 그 사람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으며 쿤은 가만히 자세를 낮추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창이나 칼 같은 것을 집어든 예닐곱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문을 막으며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다른 녀석들은 별 볼일 없어보여도 맨 앞의 파도잡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추측한 바에 의하면 잡혀 온 사람들은 E급이거나 그 이하일 텐데, 벌써 방을 세 개나 부를 수 있다니 밤 정도는 아니라도 어지간한 실력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파도잡이가 소리쳤다.
“표식을 보여라! 그러면 문을 통과시켜주지!”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왕난이 기세 높게 되받아쳤지만 상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런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표식을 확인하겠다고? 골치가 아프게 되어버렸다. 쿤은 절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
깨어난 뒤로 당면하는 모든 순간이 못마땅했지만 가장 큰 장애는 무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문 밖의 상황이었다. 이 바깥의 장소가 적어도 아래층과는 분리되어있기를 바랐는데 들어온 무리의 몸이 흠뻑 젖어있는 것을 보아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두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첫째, 문 바깥에는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둘째, 3층의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1, 2층으로 흘러간 물이 문 바깥의 이동통로를 통해 다시 3층으로 올라왔다. 방금 전 파도잡이가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의 수위는 낮아지지 않았고, 그것은 다시 말해서 문 안이나 문 밖이나 수면의 높이가 같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순히 바깥으로 나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보다도 높은 지대로 올라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나마 무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계단이 희망의 끈이었다. 이 파도잡이를 넘어서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쿤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을 제대로 보고는 있는 거냐? 일단 몸을 피한 뒤에 표식을 확인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림없어. 그렇게 안심시켜 놓고 공격할지 모르지. 표식을 보여라! 그러면 이 길을 열어주겠다.”
쿤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게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인식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는데도,벌써 그들은 자신의 짝을 찾아 제거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특히 파도잡이의 눈빛은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진심을 가득 담고 있어서 말로는 설득되지 않을 유형이었다.
“훌륭하다, 자왕난.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도 비꼬고 싶냐? 그냥 빨리 보여주자. 시간이 별로 없어.”
쿤이 작게 비아냥 거렸지만 왕난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물을 헤치며 다가왔다. 그는 한 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쿤은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보여줬다가 우리가 가진 표식이 저들의 것과 같다면 바로 공격이 들어올 거야.”
“그럼 싸우면 되잖아.”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방을 세 개나 다루는 파도잡이가 있는데다가 수적으로도 열세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 수는 없어.”
게다가 이쪽에는 별 도움도 안 되는 꼬맹이까지 있고. 질책하듯 곁눈질하는 쿤의 표정에도 왕난은 뒷걸음치지 않았다.
“그럼 다른 문으로 이동하는 건? 아까 몇몇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로 가는 걸 봤어. 그쪽이나, 아니면 엘리베이터 쪽으로라도 도망치면 되잖아.”
“말했잖아. 그게 제일 위험해.”
“어째서? 물속에서는 상대도 잘 뛸 수 없으니 도망치기도 쉽고, 우리가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다수를 상대로 전투를 하더라도 승산이 있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죽을 가능성이 더 높아.”
쿤은 단칼에 왕난의 말을 잘랐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왕난. 넌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을 것 같아?”
“당연히 이 건물에서 한시라도 탈출하고 싶겠지.”
“맞아. 그렇다면 건물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1층으로 모이고 싶어 할 거야. 위에 있는 녀석들은 이곳에서 물난리가 난 걸 모를 테니 당연히 아래층을 향해 내려오고 있겠지. 아마 왕난 너처럼 눈에 보이는 가장 쉬운 이동수단인 에스컬레이터를 선택하려 할 거다.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고 나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 층에 내려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무, 무슨 뜻인데?”
왕난이 흠칫 놀라며 되묻자 쿤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아주 아주 위험하다는 뜻이지. 아니면 바로 위층의 상황이 엄청나게 위험하거나. 보다시피 에스컬레이터는 폭이 좁아.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피할 수 있는 루트가 없는 코스라고. 절대로 선택해서는 안 될 이동수단이야. 엘리베이터는 말할 것도 없어. 우리 층에 엘리베이터가 올 때까지 저 녀석들이 얌전히 기다려줄 것 같아?”
그럴 리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차오르는 물을 헤치고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다시 돌아갈 시간 같은 거, 이젠 없어.”
쿤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확실히 이쪽에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위협을 당하는 입장인데다가 물은 가슴높이까지 차올라왔다. 손을 잡고 있는 소년은 머리만 간신히 내놓고 있을 정도였다. 눈빛이 점점 공포로 질려간다. 그 눈에 들어찬 공포를 마주보고 있는 것은 왕난 뿐이 아니었다. 쿤은 잘게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방법이 없나. 확률적으로 생각해봐도 300명의 사람들 중 이 예닐곱의 무리 가운데 같은 표식이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는 체념하듯 셔츠의 단추로 손을 가져갔다.
“좋아. 대신 표식을 보여주면 그 길을…….”
그러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단추를 푸르던 손길도 멎었다. 쿤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살기에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같은 위기감을 느낀 왕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냐!”
방을 띄우고 있던 파도잡이가 소리쳤다. 에스컬레이터 쪽이었다. 굉장히 먼 거리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존재감에 살이 떨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둘러쓴 그는, 어떤 기술을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물 위에 서있으면서도 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였다. 마치 검은 그림자가 불빛에 흔들리는 듯했다. 그가 서있는 곳의 주변만 어둠이 서려있다. 견딜 수 없는 차가운 기운이 뼛속깊이 스며들어왔다. 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떻게 저쪽에서 올라 온 거지?”
적어도 이보다 아래층은 전부 물에 잠겼을 것이 틀림없었다. 쿤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식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헤, 헤엄쳐서?”
“그럼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겠지.”
왕난의 되도 않는 대꾸에 쿤이 싸늘하게 답했다. 검은 그림자는 느리게 수면 위를 걸어왔다. 아니, 발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분명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검은 로브가 펄럭일 때마다 본능적으로 경고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얼마안가 쿤은 그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왕난, 붙잡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심연의 어둠을 닮은 검은빛 로브가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깨를 뒤로 당기며 자세를 취하는 그의 손에 수면 아래에서부터 솟구친 새카맣고 거대한 창이 쥐어졌다.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니었다. 물 속에서도 이동 가능한 창 위에 올라타고 있었던 것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창을 조작하는 손길이 능수능란했지만 넋을 놓고 바라볼 여유는 없었다.쿤의 사고는 이미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이성이 아닌 본능이 자신과 왕난의 눈앞에 두 개의 등대를 불러냈다.황급히 손을 뻗어 등대를 붙잡는다. 그대로 하늘에 띄우자 내내 깊은 물속에 붙잡혔던 다리가 자유롭게 해방됐다. 무조건 물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러나 오로지 그 염원으로 가득 찼던 쿤이 왕난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의 앞에 두었던 등대는 텅 빈 채로 드러났다.
“자왕난! 뭐 하고 있어!”
붙잡고 올라오라고 던져준 것인데 왕난은 소년을 등에 업느라 정신이 없었다. 쿤의 뇌리가 다급하게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검은 그림자가 상체의 모든 힘을 실어 날려 보낸 창끝에 고정됐다. 검은 창이 향하는 곳은 흰 벽면이었다. 왕난에게서 들었던 설명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건물을 탈출하려는 참가자들을 막기 위해 벽면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면 고압전류가 흐른다. 그리고 이 방 안은 전기를 잘 전달시키는 물로 가득 차 있었다. 폭발하듯 달려가는 검은 창을 바라보며 쿤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절규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왕난!!”
폭발음이 울렸다.
사방으로 물이 튀고 파도가 넘실댔다. 한동안 귓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고요하게 잠겨간다. 그 정적의 한 가운데에서 쿤의 시야는 왕난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 가슴을 답답하게 두드리던 먹먹함이 풀어지면서 닫혀있던 귀가 열린다. 일순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였다. 삽시간에 쏟아지는 폭포수의 거대한 물소리가 귓가로 날아들고, 급하게 헐떡이는 자신의 숨소리와 메아리치듯 남아있는 왕난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쿤의 머리와 옷자락을 적셨던 물기가 등대를 타고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허망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고 흔들리기 시작한 눈동자는 쉴 줄을 몰랐다. 쿤의 손이 힘없이 등대 위로 떨어졌다.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숨결을 따라 가만히 너울댔다. 쿤은 이마를 쓸어 넘겼다.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해?”
쿤은 시야에 잡힌 왕난의 모습을 향해 나지막이 의문을 던졌다. 큰 소리를 칠 여력이 없었다. 살아난 것이 기적이었다. 왕난은 소년을 등에 업은 채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 간신히 등대에 걸쳐져 있었다. 그가 베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미안! 살았으니 됐잖아?”
“정말이지 넌더리가 난다.”
말은 그렇게 해도 쿤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왕난은 등대 위로 조심스럽게 소년을 올리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나 좀 멋지지 않았냐?”
“멋지긴 얼어 죽을.”
왕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먼저 등대 위로 올라간 소년이 왕난을 끌어올리기 위해 손을 붙들었다. 그리곤 힘껏 잡아당기는 순간이었다.
“으, 으와앗!”
물기가 서린 손과 발로, 잡을 것이 없는 등대에서 힘을 쏟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왕난이 등대에 배를 걸침과 동시에 소년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입을 열어 크게 비명을 질렀다. 살고자 하는 의지.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그 의지가 눈동자에 깊게 서리는 것을 바라보며 왕난은 손을 뻗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기로의 한 순간에서 왕난은 그 소년의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노, 놓지 말아주세요!”
목소리는 작았지만 가장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왕난의 손에 붙들려 간신히 목숨을 구한 소년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놓을 리가 있겠어? 쿤이 비꼬듯 말을 던졌지만 의외로 왕난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쿤은 소년의 발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또 다른 등대를 받쳐주면서 그를 응시했다. 여전히 의기양양한 농담이라도 던질 줄 알았는데 왕난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소년의 안전이 확인되었는데도 그는 소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왕난?”
쿤의 물음이 신호라도 된 것 같았다. 왕난이 내내 쥐고 있던 소년의 팔목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힘없이 딸려간 소년의 손바닥이 그대로 그의 시선 앞에 노출된다. 쿤이 조금 떨어져있던 두 개의 등대를 맞붙였다. 소년의 손바닥을 바라보는 왕난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쿤과 소년의 의문어린 얼굴 위로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거랑… 같아.”
“같다니 뭐가?”
쿤은 빠르게 되물었지만 대답은 듣지 않아도 좋았다. 쿤이 시선을 던진 소년의 손바닥 위에 그 표식이 있었다. 또아리를 튼 뱀처럼, 검게 몸을 말고 위협적으로 마주해오는 표식이다. 쿤은 그 문양을 본 기억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 왕난이 옷을 들추며 보여주던 팔뚝에서였다.
“내 표식이랑 같아.”
그의 떨리는 눈빛이 쿤을 향해왔다. 어떻게 해야 해? 그가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쿤으로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해한 것인지 소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왕난에게서 손을 빼내려 했지만 꾹 움켜진 그의 손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애써 참으려 해도 떨리는 소년의 입술은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게 내버려뒀으면 좋았을 걸. 그러나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왕난이 소년을 죽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고, 이제 와서 그토록 잔인한 감정을 짊어지고 갈 리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런 어린 아이를 데리고 출발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면, 그리고 언젠가 위협이 될 적이라면 빠르게 제거해야한다. 쿤에게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쿤은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소년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의 얼굴은 단숨에 새하얗게 질렸고 왕난의 눈동자에는 당혹함이 서렸다.
“쿤 잠깐ㅁ…….”
“숙여!”
그러나 분명 소년을 향하고 있던 쿤의 나이프는 난데없이 왕난의 머리 위를 통과해갔다. 왕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이프가 지나간 방향으로 향했다.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표식에 잠깐 눈이 팔려 정말 위험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린 것이다. 어마어마한 살기를 뿜으며 날아드는 그것은, 온통 전기바다가 되어버린 수면 위를 말 그대로 ‘날아오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물이 차올라도 죽지 않고 거대한 창을 젓가락 던지듯 집어던질 수 있는데다가 하늘까지 날아올 수 있다고?
“도대체 저 녀석 정체가 뭐야!”
쿤이 던진 나이프는 검은 그림자의 정면으로 날아들었지만 그는 살짝 얼굴을 비껴 공격을 피해갔다. 싸울 셈인가? 이런 곳에서?쿤은 방금까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던 곳을 곁눈질로 응시했다. 방금 전 물을 타고 퍼져나간 고압전류때문에 죽음에 다다른 사람들이었다. 재빠르게 물이 없는 위층으로 피한 파도잡이 외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보였다. 자칫 같은 신세가 될 지도 몰랐다.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나 쿤의 고민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는 왕난이 데리고 있던 소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어린 녀석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이 틈에 도망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왕난은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다. 왕난은 소년을 자신의 등대로 끌어당기면서 검은 그림자가 내던진 거대한 창의 공격을 피했다. 쿤이 재빠르게 왕난과 소년이 타고 있는 등대를 조작해 검은 그림자에게서 먼 곳으로 이동시켰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렇게 하고 나니 검은 그림자의 정면에 있는 것은 이제 쿤 자신뿐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위압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소년에 대한 공격이 실패해 허공에 멈춰 선 검은 그림자는 일렁이는 공간 위에 서있었다. 어떤 방법인지는 몰라도 신수를 조작할 줄 알거나 특별한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괴물은 괴물이었다. 쿤은 그를 바라보며 잠시 식은땀을 흘렸지만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 노란머리와 꼬마의 표식은 같은 것이다. 같은 표식이 세 명에게 존재할 리는 없으니 네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러니 여기서 네 표식과 같을 가능성이 있는 건 나뿐이다. 나를 노리고 덤벼 봐.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까.”
등대라는 한정적인 공간 위에서의 전투는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가 근접전에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등대를 사용해야만 이동할 수 있는 허공에서 저런 괴력의 괴물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상대하겠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천하의 쿤 아게로 아그니스가 쿤 가문의 가주가 되어보지도 못한 채, 마음에 품은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그리고 가까스로 만난 소중한 밤과의 시간을 좀 더 함께하지 못한 채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긴장되는 시간이 흘렀다. 검은 그림자는 잠시 쿤을 바라보았다. 그치지 않는 물줄기의 소리만이 우렁차게 울려 퍼질 뿐이다. 그러나 잠시 후 검은 그림자는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어떤 판단을 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조용히 쿤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 문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쿤은 검은 그림자가 사라져버린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지만, 그 괴물은 망설임 없이 날아가 물이 닿지 않는 위층 계단에 사뿐히 내려섰다. 푹 눌러쓴 로브 안에서 자색의 눈동자 두 개가 빛났다. 잠시 쿤과 마주 보던 그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층을 떠났다.
쿤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계속 여유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왕난과 소년이 타고 있는 등대를 불러들여 악몽과도 같았던 방을 탈출했다. 검은 그림자가 내려선 곳에서 쿤이 조작했던 등대가 사라졌다. 쿤은 가볍게 착지했지만 왕난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소년이 그 위로 떨어져 한 번 더 충격을 가했다. 끝없이 쏟아지던 물은 3층 계단의 가장 높은 곳, 그 이상으로는 차오르지 않았다. 아마 3층의 방 전체를 채우고 나면 멈추게 되어있는 구조인 것 같았다. 살아남은 사람은 사라져버린 검은 그림자를 제외하면, 쿤과 왕난, 회색 머리의 소년, 그리고 대처가 빨랐던 파도잡이 한 사람 뿐이었다.
“아직도 해볼 건가?”
쿤이 얼빠진 얼굴을 한 파도잡이를 향해 물었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주저앉았다. 자기편도 없는데다가 어마어마한 살기를 경험한 직후라 전투에 임할 기력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아보였다. 그것은 쿤이나 왕난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층 하나를 올라왔을 뿐인데 온 몸은 물에 젖어 만신창이였고 팔다리에 힘도 쥐어지지 않았다. 왕난은 그대로 바닥에 누워 대자로 뻗어버렸다.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새파란 물이 그의 발바닥 끝자락에서 장난을 걸 듯 찰박거렸다.
“우리, 살아남은 거지?”
왕난이 힘없이 물었다. 쿤은 물에 잠겨버린 어두운 계단을 바라보며 가만히 대답했다.
“그래. 저 아래에 누가 있었든, 몇 명이 있었든, 이제는 아무도 살아 돌아올 수 없어.”
“정말 싫다. 왜 이런 사이코 집단과 게임 따위를 해야 하는 거지?”
“단순한 게임이 아니야. 정말로 목숨이 걸려있다.”
부디 저 어둡고 차가운 심해에 밤과 라크가 있지만은 않았기를. 쿤은 그렇게 기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걸음 걸어갈 여력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너부러져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게임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야.”
건물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문이 1층에 있었더라도 이제 아무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위로 향하는 것 외의 선택은 주어지지 않았다. 누가 기획한 것이든 간에 게임은 시작되었고 같은 표식을 찾아 죽이는 것 외에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이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건물의 어딘가에 밤이 있을지 몰랐다. 제발 이 날뛰는 죽음의 시간 속에서 너만은 무사히 있어주기를.
그렇게 기원하며, 쿤은 계단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4층을 향한 출발이었다.
- 01. 끝. -
<건물의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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