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쿤(밤쿤)] 표식 1장 - 03 글상자/└표식(연재중)2016. 8. 6. 23:48
* 밤쿤 (올레쿤) 중심의, 원작세계 기반 서바이벌 스토리입니다.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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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일러스트는 요찌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장. 첫째 날
- 03 -
가까이에 있는 그리움을 전부 놓쳐버렸던 지난 7년이라는 세월은, 떠올리면 아쉬움이라는 감정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품 안에 두고 싶었던 소중한 사람들은 모래자락처럼 빠져나가버렸고,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자신의 무능력함은 몇 번이고 자신을 괴롭혀왔다. 선별인원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탄탄대로의 길을 걸어왔기에, 이것을 ‘축복’이라 부른대도 과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머물렀던 자리는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그저 함께 탑을 오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 작은 소원 하나를 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호를, 그 다음에는 밤을, 그리고 쿤을, 라크를. 많은 동료들을 떠나보냈다. 이별을 마주한다는 것은 한없이 쓸쓸하고 고통스럽기에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끝없이 마음이 쓰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직도 안 받네.”
이수는 답이 돌아오지 않는 포켓을 지켜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까스로 되찾은 동료들이기에 자꾸만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소식을 전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시시콜콜한 대화라도 좋았다. 쿤은 너무 자주 연락하는 것 아니냐며 타박을 늘어놓았지만 그들의 여정에 관해 무엇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밤이 살아 돌아오고, 죽은 줄 알았던 쿤을 만나고,그리고 그들과 다시 헤어진 지 2주 쯤 지난 시간이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놀이동산 같은 곳에나 놀러간다던 쿤과 일행은 좀처럼 연락이 닿질 않았다.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거냐? 노느라고 정신 없나보지.”
하츠는 손에 든 작은 사진 하나를 들여다보며 시큰둥하게 시선을 돌렸지만 이수는 불만을 그치지 않았다.
“태평스럽게 놀이공원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냐고.”
“너도 같이 가고 싶었던 것 아닌가? 난 그렇게 보였는데.”
“그러니까 너무하다는 거지! 어떻게 연락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안전을 걱정하는 게 아니군.”
하츠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대꾸했다. 대충 간단한 말대답만 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특별히 짚어주지 않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었지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하츠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밤과 쿤 녀석들의 생각이나 하면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것은 이수 쪽이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수십의 구두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아무거나 사면 안 되나?”
“…진심인거냐? 엔도르시에게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니까 그렇지.”
이수는 한숨을 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좋으니 이제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지만 하츠의 눈에는 포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노력에 운명이 따라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문득 낮은 선반 쪽을 바라보던 하츠가 한 쌍의 행운을 집어 들었다.
“이건 거 같은데?”
12센티 굽이 달린 주황색의 하이힐이었다. 구두코에 장식 된 붉은색의 작은 큐빅이 형광등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한숨만 푹푹 내쉬던 이수가 그것을 건네받았다. 하츠의 손에 들린 사진과 자신의 손에 들린 구두를 신중한 눈빛으로 번갈아보던 그는, 돌연 화색이 도는 얼굴로 환히 웃으며 소리쳤다.
“맞는 것 같아! 이거다, 이거!”
“정말 맞겠지?”
하츠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자칫 잘못 구매하기라도 했다가는 엔도르시로부터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완벽히 일치하는 제품이어야만 한다. 그는 이수보다도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드디어 결론을 내렸는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드디어 찾았군. 전 백화점을 다 돌았어.”
“난 꽤 지쳤다고. 서둘러서 돌아가자!”
절대 여자구두를 들고 카운터로 가지 않겠다는 하츠의 완강한 거부 때문에 계산은 언제나 이수의 몫이었다. 그는 하이힐을 손에 쥔 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구두의 값을 치렀다. 협박에 가까운 부탁을 받아 엔도르시의 심부름을 나온 지가 반나절이었다. 묵고 있는 숙소에서 비교적 가까운 백화점이었는데도 그녀가 말한 구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엔도르시의 성난 얼굴을 마주하느니 길거리에서 밤새 헤매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어찌됐든 말한 구두를 구하게 되어 다행이었지만 여성 선별인원들 사이를 뚫고 쇼핑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었다. 이수는 맥이 빠진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린 채 물었다.
“계속 걸었더니 배가 고파……. 우리 뭐 좀 먹을까?”
“주전부리를 할 시간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대꾸하는 하츠의 뱃속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이수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지만 하츠는 시선을 피했다. 그의 손에 들린 쇼핑백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좋아. 그럼 뭘 먹는 게 좋을까나…….”
하츠의 의견은 무시한 채 음식코너로 가는 길을 찾는 이수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달게 구워진 빵이라든가 장어꼬치 같은 간식거리를 떠올리자 입 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분식집의 떡볶이도 좋을 것 같고 볶음밥 같은 든든한 요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이, 십이수.”
그런데 문득 하츠가 그를 불렀다. 이제 와서 그냥 돌아가자고 해도 절대 끌려가지 않을 테다. 그런 결심을 하며 불만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든 이수는 하츠의 손끝이 이상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가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눈앞에 작은 플랜카드 하나가 나타났다. 이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뭐지? D급 선별인원을 위한 특별 음식전…?”
“백화점에서 이벤트로 하는 행사인 것 같군.”
“무료 시식회 같은 거 있지 않을까? 들어가 볼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두 사람의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플랜카드를 어떻게 발견했나 싶을 정도로 구석진 곳이었지만 길을 따라 들어갈수록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조명 빛조차 어둡게 가라앉은 벽면에 다다르자 열린 문 너머로 커다란 연회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
얼떨결에 발을 디뎠는데 안쪽의 풍경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샹들리에로 꾸며진 천장은 빛을 발했고 잔잔한 분위기의 클래식한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중앙에는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요리들이 주를 이루며 늘어서 있어 먹음직한 냄새가 회장을 가득 채웠다. 쉽게 먹어볼 수 없다던 신해어 요리로 가득이었고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재료의 음식들도 많았다.
그 흥의 한가운데를 누비며 고급스러운 식사를 즐기는 것은 다양한 차림새의 선별인원들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인 로브를 뒤집어 쓴 커다란 사내가 조그마한 접시를 들고 거니는 모습은 정성스럽기까지 했고, 한 곳에 가만있지를 못해 폴짝거리며 돌아다니는 빨간 머리의 소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혼을 빼놓았다. 이질적인 문화로 꾸며진 연회장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이수가 주저하며 돌아서자 하츠가 의문을 표했다.
“원래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모, 몰라. 어쨌든 우리가 끼기에는 차원이 다른 장소 같은데……?”
진땀이 흘렀다. 역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배고픔도 잊어버린 이수가 발을 빼려는데, 몸을 돌리자마자 그의 정면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나타났다. 추궁하듯 질문을 던지는 그 사람의 뒤로, 출입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D급 선별인원 이십니까?”
“아, 예에. 뭐 일단은…….”
이수가 말끝을 흐리며 당황하자, 말끔한 양복차림에 검은 구두를 신고 붉은 나비넥타이를 맨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웃옷 주머니 부근에 달린 작은 명찰에는 지배인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아마 이 연회장의 최고 책임자 쯤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함께 축제를 맛보시죠. D급 선별인원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입니다.”
“아, 아니 하지만 왠지 비싸 보이고…….”
“부담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D급 선별인원이시기만 하다면 이곳에서 모든 것을 공짜로 즐기실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고급스러운 요리가 전부 공짜라고? 입 꼬리를 올리며 웃는 지배인의 표정이 어쩐지 불길했다.
“왠지 수상한데. 정말 평범한 이벤트가 맞는 겁니까?”
이수가 묻자 지배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거두어진다. 하츠가 슬그머니 허리춤에 찬 파이프로 손을 가져갔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지배인의 얼굴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덤덤했다.
이수는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백화점 이벤트로 진행되는 행사라고 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현장이었다. 얼핏 보면 뷔페처럼 보이는 겉모습은 갖추고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커다란 행사를 조명도 잘 들어오지 않는 구석에서 진행한다는 것도 그렇고, 요리사나 다른 여타의 웨이터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그랬다. 게다가 연회장에 참가한 사람들의 복장도 이상했다. 보통 연회라고 하면 그에 맞는 예복을 갖춰 입어야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붙잡혀 끌려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평범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평화롭게 음식을 먹고 있지만 과연 평화로운 장소인걸까?
“뭐하는 놈들이냐.”
이수가 지배인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나 대답대신 살기서린 미소만이 되돌아왔다. 이수와 하츠가 자세를 낮추며 뒤로 물러서자 지배인은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방금까지 화려하게 빛났던 사람들의 시선이 죄 두 사람에게로 몰려왔다. 마음을 안정시키던 노래가 그친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적인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일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눈앞에 선 지배인은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여유 가득한 얼굴이었다.
“곤란한 분들이군요. 아직 예정했던 숫자가 다 차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뭐, 할 수 없죠. 이쯤 해두도록 할까요.”
“무슨 수작이야!”
틈새를 치고 나가려면 단숨에 기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츠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는지 타이밍을 재는 중이었다. 하츠가 지배인을 공격하는 사이에 이수가 출입문을 돌파할 수 있었다면 두 사람 모두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교차하는 시선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쯤, 이수는 자신의 시야가 뿌옇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 주위를 살피자 같은 증세를 겪고 있는지 비틀거리며 주저앉는 하츠의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마저 맥을 못 추다니 이거 상당히 위험한데. 이수가 실소를 흘리는 사이 누군가가 풀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방금 전까지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붉은 머리의 소녀였다. 애써 주변을 의식하니 연회장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점차 숨이 가쁘고 정신이 흐려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있을 수가 없었다. 연기를 마신 건가. 회장 안을 가득 채운 음식냄새에 가려져있어 눈치 채지 못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게 다 쿤 녀석들이 놀이동산이다 뭐다 떠들어대니까 덩달아 긴장감을 풀어버린 것이다.
가까스로 버티던 마지막 힘마저 빠져나가 이수는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기대며 쓰러졌다. 기울어진 시야 너머로 여러 개의 발자국이 보였다. 뚜벅, 뚜벅,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작은 운동화가 소름끼치게 두려웠다. 구두, 가 아닌 건가.
“……서……아…………때?”
들려오는 목소리가 흐릿하게 식어간다. 이수는 그의 옷깃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얼굴이 보일 듯이 말듯이 점점 어두워졌다. 다가오는 절망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하츠의 부름만이 희미하게 남아 귓가를 맴돌았다. 엔도르시에게 신발을 전해줘야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이수는 가만히 정신을 잃었다.
* * *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을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은 생각보다 처절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약한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사실이었고, 탑에 들어왔을 때부터 십이수라는 이름 세 글자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속박이기도 했다. 자신에게는 쿤과 같은 가문의 든든함도, 아낙과 같은 어마어마한 힘도, 엔도르시나 하츠와 같은 뛰어난 기술도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앞서가는 이들의 등을 밀어주며 함께 가는 것뿐이었다.
다른 동료들처럼 강했다면 소중한 녀석들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은 탑에 들어온 이후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다녔고, ‘리더’라고 불러주는 동료들의 시선은 언제나 부담스러웠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을, 계속해서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기만 하는 자신을, 동료들은 어째서 한결같은 믿음으로 따라와 주는 것일까. 자괴감이 들었던 나날들도 많았다. 앞서 달려가며 검을 휘두르고 창을 날리며 싸워가는 동료들의 등을 볼수록 오히려 주저앉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짚어본다면 동료들의 신뢰에 부응한다거나 반드시 복수를 이루겠다거나하는 그런 거창한 종류는 아닐 것이다. 그저, 발버둥 치고 싶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이라도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서 좋아하는 녀석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못나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이 믿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발버둥이 끝나는 것은 언제일까. 자신이 가진 쥐꼬리만큼의 힘이 모두 빠졌을 때? 모든 것을 관두고 싶어졌을 때?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지금의 자신은 이 발버둥을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골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이수는 가만히 눈을 떴다.
[여러분의 몸에는 특정한 표식이 있을 것이다. 이 게임장에 있는 300명의 사람들 중 자신과 같은 표식을 지닌 자를 찾아서 죽이면 된다. 다시 말해 이곳에는 150쌍의 표식이 있고, 자신과 같은 표식을 지닌 자신의 ‘짝’을 찾아 제거하면 살아남을 수 있지.]
살아남는다고……? 그는 아파오는 머리를 붙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귓가를 웅웅 대는 목소리 대부분의 의미는 알아듣지 못했다. 주절주절 떠드는 스피커 소리에 귀가 아파올 뿐이었다. 하츠는 어디 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익숙한 얼굴은 없었다. 넓고 넓은 방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 몇몇이서 웅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하얀 벽지로 가득한 방의 모습은 어쩐지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드는 것만 같다.
[지금 시간은 오전 6시다. 제한 시간은 72시간, 다시 말해서 게임이 종료되는 것은 3일 뒤의 이 시간인 오전 6시다.]
그러니까……, 이게 게임이라고? 무슨 게임? 이수는 다시 방 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스피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린데. 그래. 불현 듯 생각이 떠올랐다. 그 기분 나쁘게 웃음 짓던 지배인의 목소리였다. 역시 그 녀석의 짓인가.
[그때까지 자신의 짝을 찾아 죽이지 못하면 그 표식을 지닌 두 사람은 모두 죽는다. 6시간 마다 한 번씩 종을 울려 시간을 알려줄 것이다.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에게 행운이 따르길 빈다.]
죽이라고? 누굴? 아주 최소한의 정보밖에 듣지 못했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과 그들이 미쳐있다는 것 정도가 가까스로 취득할 수 있었던 정보였다.
[자하드에 영광을!]
거 참, 시끄럽네. 이수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상한 자들에게 이끌려 연기를 들이마시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도 떠올랐다. 검은 로브의 사내와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 그리고 지배인의 얼굴 또한 뇌리에 남아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하츠를 찾는 것이 최우선이겠지만 하츠가 없는 이상 일단은 방을 탈출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탈출구는 저절로 생겨날 모양이었다. 건물 전체가 정신없이 흔들리더니 벽이 갈라지고 새로운 형태가 드러난다. 커다랗게 6이라 적힌 숫자가 있는 곳의 아래쪽으로 커다란 문이 나타났고, 다행스럽게도 자신은 그 문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좋아 움직여볼까.
그러나 이수의 머릿속에 탈출을 위한 탄탄대로가 펼쳐진 순간, 갑작스럽게 어둠은 찾아왔다.
“뭐, 뭐야!”
“안 보여!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이 점점 커졌다. 이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우연한 정전일까? 아니면 일부러 전기를 끊은 것일까? 우왕좌왕하는 무리 안을 지배하는 공포감이 더욱 커진다. 낯선 상황으로의 강제적인 납치.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정체불명의 게임. 그리고 갑작스러운 정전. 평범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공포감으로 물들게 하기에는 충분한 요건이다.
사방에서 등대와 포켓의 불빛이 켜지고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당황한 사람들의 불빛 너머로 비치는 얼굴은 모두 겁에 질려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빛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같은 편인지 아니면 적인지 알 수 없는 이상 판단은 신중해야했다.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빛의 개수는 많지 않았다. 이 넓은 곳에 존재하는 인원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공간이 워낙 넓었고 그 전체를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이 가득 채우고 있다보니 몇 개의 불빛만으로는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수는 가만히 바닥을 짚었다. 찬 기운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졌다. 우선은 자신이 있는 위치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필요했다.손이 닿는 곳마다 팔을 뻗어 만지고 두드려본 뒤 조심스럽게 포켓을 불렀다. 불빛을 켤 생각은 아니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은 가장 위험한 행위였다.
그는 엔도르시라든가 아낙이라든가, 아무에게나 연결되기를 바라며 통신을 시도했다. 조금은 기대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신호음조차 가지 않을 만큼 먹통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300명이나 되는 선별인원들을 납치해놓고 멀쩡히 통신기능을 열어두었다면 바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외부에서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빛이 사라졌다는 상황만으로 혼란에 빠져버리는 저 멍청한 사람들과 연합을 맺을 수도 없었다.
완전히 혼자서 해쳐나가야 한다. 하필이면 늘 곁에 있던 하츠마저도 사라져버렸으니 상황은 최악이었고 돌파구는 없어보였다.때때로 동료들이 없이도 적을 물리치는 강한 자신을 상상하거나 꿈꾸기도 했지만 막상 그 지겨운 얼굴들이 모두 사라진 채 절체절명의 순간을 마주하니 막막함이 먼저였다.
그래도 마냥 주저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십이수,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다. 밤과 재회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죽을쏘냐. 이수는 엔도르시의 구두를 찾을 때나 필사적으로 가동되던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불이 꺼지기 직전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다행히 함정이 설치되어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동시에 나타났던 출입구는 네 개. 자신이 있는 위치는 엘리베이터 쪽과 가까운 벽이겠지만 여기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같은 이유로 에스컬레이터를 선택할 수 없었다. 가장 안전한 출입구라면 역시 커다란 숫자의 밑에 위치해있던 출입문이다.
결정을 내리자 행동은 한 순간이었다. 이수는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아무리 캄캄한 어둠 속이라 해도 방 안의 구조가 머릿속에 있는 이상, 벽을 찾기만 하면 탈출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문의 바깥도 어둠일지, 아니면 빛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가만히 있는다면 언제까지고 빛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찾는 것은 벽이었다. 이 방안에서 고정되어있는 물체는 벽뿐이니 이동하는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벽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
머지않아, 천천히 이동하던 이수의 손끝에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이 닿았다. 그는 가만히 웃음 지으며 벽 위로 손바닥을 펼쳤다.이제 이 벽을 오른쪽에 두고 쭉 걸어가기만 하면 출입구까지 이어질 것이다. 발길을 옮기는 그의 걸음에 한결 안정감이 서렸다.별다른 위험은 없어보였다.
과연 자신들을 납치한 녀석들은 누구일까. 정보가 많지는 않았으나, 자하드에 대한 충성을 외치며 선별인원들을 심사한다는 둥 나대는 것을 보아하니 다행스럽게도 밤이나 라헬과 연관이 있는 단체는 아닌 듯했다. D급 선별인원을 위한 연회니 뭐니 하며 무작위의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아 노림을 당했다기보다는 운이 나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이수가 채 생각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어둠을 타고 들려온 하나의 고성은 순식간에 방을 가득 채웠고, 웅성대던 사람들의 수많은 목소리는 불길한 두려움 속으로 사라졌다. 이수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유달리 고요한 심연의 한 가운데에서, 문득, 붉은 빛 하나가 반짝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으아, 으아아아! 사람 살려!”
또 한 번의 목소리. 지독하게 메아리치는 누군가의 비명소리에 대실 안에는 커다란 혼란이 찾아왔다. 털을 쭈뼛 세우던 침묵은 산산조각 나고 두려움에 질린 얼굴을 비추던 사방의 불빛들은 요란스럽게 날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미쳐간다. 알 수 없는 돌발적인 위협 앞에서 어둠 속은 난장판이 되었다. 등줄기를 타고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하나의 빛이 사라질 때마다 하나의 붉은 빛이 깜빡인다. 사방으로 날뛰며 돌아다니는 여러 개의 빛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였다. 등대의 빛을 켠 것이라고 하기에는 위화감이 드는 불길한 불빛이다. 저게 뭐였지? 이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해지는 열기도, 흔들리는 모양새도, 모두가 이질적이다.
마치, 어둠의 한 가운데에서 솟아오른 불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불?”
돌연 뇌리를 스쳐가는 이미지가 있어 이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일시적으로 피어올랐던 붉은 불빛이 자신의 눈앞까지 다가와 팟, 하고 켜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불. 그것은 틀림없는 불꽃이었다. 이수는 붉게 타오르는 불꽃 너머에서 웃고 있는 새빨간 미소를 마주한 순간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타오르는 불꽃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분명한 살기였기 때문이다. 이수는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들어 날아오는 불꽃을 피했다가 다시 벽으로 바짝 붙었다. 벽에서 멀어지면 방향 감각을 잃게 되어 방 안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벽에서 손을 떼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빠르게 판단한 그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다. 머리가 정신없이 돌았다.
똑같이 납치당했으면서 어째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거지? 극한의 상황에 몰려 미쳐버렸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한 순간의 선택이 목숨을 좌우하는 상황이었다.
“거기 서, 먹잇감!”
멀쩡히 살아있는 인격체를 보고 먹잇감이라고 부르다니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수는 출입구 쪽을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불꽃이 곁을 스칠 때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어둠의 일부분이 삼켜졌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답은 뻔했다. 어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수는 고민하지 않고 옵저버 두 개를 꺼내, 좁고 어두운 곳을 탐색할 때 사용하는 불빛을 켰다. 부디 이 녀석의 사고패턴이 단순하기만을 빌 뿐이었다.
“죽기 싫어!”
커다란 불꽃 하나가 자신의 곁을 스쳐가 어둠이 돌아온 순간, 일부러 크게 소리며 이수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이수와 함께 이동하고 있던 옵저버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멈춰있는 곳과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두 개의 옵저버를 날려 보냈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사방으로 흔들며 줄곧 뒤따르던 상대의 표적을 옵저버로 한정시켰다. 옵저버들은 자신의 조작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최대한 먼 곳까지 재빠르게 날았고, 목숨을 위협해오던 불꽃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그 붉은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 간다.
기회는 한 순간이었다. 이수는 다시 벽을 짚고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불빛을 피울 수 있는 정도의 신수 능력자라면 옵저버가 미끼라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출입문까지 다다라야했다. 이수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잠시도 멈추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던 불꽃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살펴 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이 작은 발버둥이 삶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또 다시 잃어버렸던 소중함과 맞닿을 수 있는 시간을 이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 죽은 줄 알았던 밤도, 쿤도, 모두 돌아온 것처럼. 살아있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또 함께 탑을 오를 수 있다.
손끝에 닿던 감촉의 재질이 달라졌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손가락 끝에 걸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드디어 다다른 곳은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출입구였다.
“어디 한 번 쫓아와 봐라!”
이수는 크게 소리치며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내내 어둠으로 가득했던 방 안으로, 문 너머의 빛이 구원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러나 그는 바깥의 계단을 타고 도망치지 않았다. 마치 탈출에 성공한 것처럼 속여 입구를 개방한 뒤, 어둠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숨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스스로의 자세를 낮춘 뒤 가만히 출입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이었다.
“거기 서!”
이수가 방 밖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한 그 불꽃의 살기가 출입구 가까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밖에서부터 비춰오는 빛이 그의 붉은 머리를 선명하게 밝힌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작은 소녀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수를 찾으려는 듯, 이 지옥 같은 방을 벗어나 잠시 고민하더니 위층의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몇 차례나 그의 목숨을 위협했던 붉은 공포가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이수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길고 긴 시간을 버텼다. 이수가 열어준 출입문은 방 안을 헤매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닮은 행운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겁에 질려 주저앉았던 사람들도, 작은 포켓의 불빛에 의지해 헤매던 사람들도, 모두 출입문의 빛을 발견하고 모여들었다. 방을 가득 매웠던 포켓의 불빛이 하나둘 방을 빠져나간다. 그럼에도 이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홀로 어둠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명과 공포로 가득 찼던 6층의 방이 이윽고 고요해졌다. 작은 불빛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가 밖으로 사라졌다. 이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져버린 이런 고독함은 익숙하지 않았다. 탑에 들어와 동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위로 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세계는 언제나 시끄러운 것들로 가득하기만 했다. 밤을 잃었을 때도, 쿤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곁에는 동료들이 함께 있었다. 서로 구박하고 핀잔하고 으르렁댈 때에도 밤의 죽음이라는 한 가지 사실로 묶여진 운명 공동체가 곁에 있었기에 그 쓸쓸함을 견뎌올 수 있었다.
혹시 밤이 시험의 층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수는 모두가 사라진 조용한 어둠 속에서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시끌벅적하게 떠들어주는 동료들이 없이 혼자 남겨진 어둠은 이토록이나 고독하고 이토록이나 쓸쓸하다. 밤은, 그리고 쿤은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선 것이기에 그토록 빛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강함의 근원지가 바로 그것이리라.
“좋아. 가볼까.”
그렇기에 자신 역시 멈춰 설 수 없었다. 이 쓸쓸함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다. 절망 속에 멈추어있기만 한다면 줄곧 그리웠던 사람들을 되찾을 수 없다. 자신은 옵저버와도 같아서 강한 동료들이 곁에 있지 않다면 그다지 쓸모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시험의 층에 있을 때만큼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한심한 녀석은 아니었다. 모두가 처절한 발걸음으로 위를 향해 걷고 있을 때 자신이라고 해서 멈춰 서있던 것이 아니기에, 이수는 빛을 향해 발을 디뎠다. 위보다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했다.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나간다. 오직 그 일념만이 그를 지배했다.
“왕난!”
그런 이수에게 뇌리를 관통하는 목소리가 찾아왔다. 이수는 하나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운명일까, 그게 아니라면 필연일까. 거칠게 쏟아지는 외침은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온다! 조심해!”
언제나 동료들을 지켜내기보다는 지켜지는 쪽이었다. 밤이 죽었을 때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쿤이 라헬과 함께 무리를 떠나갈 때에도, 그 소식을 들은 라크가 폭주할 때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기까지 탑을 올라오는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던 꼬리표였다. 가장 약하고, 가장 무력한 존재. 그것이 십이수라는 이름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수는 발을 움직였다. 끝없이 가라앉아가던 어둠의 공포와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적인 쓸쓸함. 그 지옥을 겪으면서 바랐던 것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탐색꾼의 등대를 불렀다. 기다란 창을 세팅하고 깊은 숨을 호흡한다. 목표물, 좌표, 하고자하는 목적. 그리고 이 심장을 가득 채우며 떨리는 희열감. 걸쳐놓은 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사되어 강하게 날아들었다.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걷히고,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살기가 가라앉는다. 놀란 표정으로 마주해오는 그 푸른 눈동자는 늘 곁에 있고 싶었던 그리움이었다. 눈물이 터질 것처럼 벅찬 반가움이 흘러들어온다.
가까이에 있는 그리움을 전부 놓쳐버렸던 지난 7년이라는 세월은, 떠올리면 아쉬움이라는 감정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은 아직도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여어, 안녕들하신가?”
이수는 그 파란의 한 가운데를 향해, 발을 디뎠다. 그리고 당당히 가슴을 폈다. 그 푸른 눈동자의 떨리는 입술사이로 자신에게 남은 하나의 존재감이 흘러나왔다.
“십이수……?”
쿤 아게로 아그니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 03. 끝 -
<건물의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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