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쿤(밤쿤)] 표식 1장 -04 글상자/└표식(연재중)2016. 8. 6. 23:52
* 밤쿤 (올레쿤) 중심의, 원작세계 기반 서바이벌 스토리입니다.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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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일러스트는 요찌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장. 첫째날
- 04 -
자욱했던 연기가 공기 중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달려들던 위협도 그쳤다. 방금까지 죽음과 삶의 가운데 걸쳐진 흔들다리를 건너는 느낌이었는데, 순식간에 방 안은 고요해졌다.
쿤은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리며 적의 모습을 살폈다. 새롭게 등장한 누군가의 존재에 조금은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엔기스가 다치지 않도록 품에 꽉 끌어안은 왕난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일단은, 무사한 모양이었다. 그제야 쿤은 이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 정말 십이수냐?”
“천하의 쿤님도 이런 상황이 되니까 당황했나보지? 다친 데는 없냐?”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있다.”
정말로 십이수였다. 밤이나 악어 녀석이면 모를까 십이수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애당초 이 기이한 장소로 납치당하기 전부터 십이수와는 아예 다른 층에 있었으니 그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상황을 따지는 것은 나중이었다. 지금은 눈앞의 적을 넘어서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상대는?”
이수가 자세를 낮추며 물어왔다. 조금 당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입가에는 먹잇감들을 비웃는듯한 미소마저 올라있었다. 쿤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등대를 가까이 했다.
“아는 바가 없다. 적어도 E급은 아니야.”
“그럼 D급인가? 저런 녀석이 있다는 소문은 못 들어 본 것 같은데.”
“이 황당한 게임장에 D급 이하만 끌려 들어온 게 아니라면, 그 이상일 가능성도 제외할 수는 없어.”
쿤은 침착하게 대꾸하며 적을 응시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십이수가 가세했다고는 하지만 밤이나 악어가 있으면 모를까, 지금의 구성원으로는 정면으로 맞서 이길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수가 들어온 문으로 다시 도망친다면 방 안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가 추적해온다면 완전히 달아나기는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좁은 계단에서 녀석과 싸움이 벌어진다면 몰살당할 것이 뻔했다. 천장을 뚫을 수도 없고 벽에 충격을 가할 수도 없다. 게다가 퇴로마저 없느니만 못하다. 그렇다면 눈에 들어오는 탈출구는 딱 하나 뿐이었다.
“어이, 쿤. 허를 찔러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십이수 녀석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다행히 작전을 설명할 수고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쿤은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왕난도 뭔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엔을 감싸 보호하며 신수폭탄을 손에 쥐었다. 선별인원이면서 최소한의 전투능력도 갖추지 못한 것인지, 역시 저 놈의 꼬맹이가 거슬리지만, 추궁은 나중이었다.
“어이!”
쿤은 상대를 크게 불렀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아 긴장하고 있던 왕난이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쿤은 그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소리쳤다.
“싸움 좀 한 가닥 하는가보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 무서운 공격들이 하나도 통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 어이, 쿤!”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를 판에 갑자기 상대를 도발하기 시작하는 쿤의 행동은 왕난에게 있어서는 가히 공포에 가까웠다.
“아니면 사실은 전투에 별로 자신이 없으신가? 그래서 그렇게 멀리에 서서 표창 던지기나 하고 있는 거야? 어때? 진짜로 위험한 녀석이 누구인지 가르쳐줄까?”
“하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는 장난스럽게 얼굴 위로 올라와있던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입꼬리를 내리며 굳어지는 얼굴에 왕난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반면에 쿤은 이전보다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생각한대로의 반응이었다. 상대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무턱대고 공격부터 퍼부을 정도로 단순한 성격이라면 작은 도발에도 쉽게 말려들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뭐가 어째? 녀석 때문에 봐주려고 했더니.”
점점 가라앉아가는 목소리는 그들이 만나 온 어떤 상대보다도 위험하게 들렸다. 그 자는, 릴 인벤토리를 가시모드로 전환하고 그곳에서 가장 커다랗고 날카로운 낚시대를 뽑아들었다. 실력의 급도 거대한 차이가 날 만큼 다른데, 게다가 전투에 가장 특화 된 낚시꾼이라니. 상황은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이수가 옵저버 두 개를 꺼내며 조심스럽게 쿤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이마에 맺혔던 한 방울의 땀이 볼을 타고 가만히 미끄러졌다. 그러나 쿤은 겁도 나지 않는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다그쳤다.
“그게 아니라면 어디 증명해 봐. 네 녀석의 강함을.”
“겨우 선별인원 밖에 안 되는 애송이들이!”
쾅, 소리를 내며 그가 땅을 박차고 날아든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이수가 몇 개의 나이프를 던졌지만 재빠르게 피하는 표적을 맞출 수는 없었다. 살의로 가득 찬 죽음이 사력을 다해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을 치든지, 아니면 뭔가 더 강력한 공격을 하든지. 거대한 상대에 맞서 뭔가 제스처가 있어야 하는데 쿤은 그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왕난!”
이수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왕난은 들고 있던 신수 폭탄을 던졌다. 반사적인 행동에 더 가까웠겠지만 어느 정도 효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다가오는 적의 기세가 잠시 주춤한 사이, 쿤은 드디어 손을 들어올렸다.
“쿤! 아직 너무 일러!”
등대를 조작하기 시작한 쿤을 향해 이수가 소리쳤다. 그러나 쿤은 조금도 조급하지 않은 표정으로 침착하게 등대를 배열했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끝까지 긴장 늦추지 마.”
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왕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왕난은 저도 모르게 엔의 손을 잡았다. 겁에 질려 떨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엔은 침착하게 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제법 용기 있는 녀석이었다. 왕난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다시금 신수 폭탄을 준비했다. 같은 낚시꾼이라고 해도 아직은 한참 높은 곳에 존재하는 커다란 사람이었다. 왕난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조금만 더……!”
타이밍을 정하는 것은 이수의 몫이었다. 쿤은 이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로지 등대를 조작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작전 한 마디 상의한 적도 없는데 도대체 둘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왕난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지금은 오직 그 둘의 판단만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금 더……!”
이제는 몇 걸음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살기를 한 가득 품은 눈동자가 피처럼 붉게 빛났다. 그가 들고 있는 낚시대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대로 죽는다. 발목을 붙잡은 어둠의 그림자가 몸 전체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왕난은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으며 소리쳤다.
“쿤!!”
“지금이야!”
이수의 외침이 허공을 강타하는 것과 동시에, 강렬한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엔의 목을 칭칭 감은 목도리도 정신없이 나부꼈다. 왕난은 이빨이 부서지도록 입을 다물었다. 당장 죽음이 코앞을 지나던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날카로운 날 끝이 눈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평온하기 짝이 없는 하얀 벽뿐이었다.
“멍하니 서있지 마! 달려!”
왕난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 것은 쿤의 외침이었다. 이수는 이미 저 앞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왕난은 엔의 손을 붙잡은 채로 이수와 쿤을 따라 달렸다. 등대를 이용한 텔레포트였다. 방금까지 그들이 서있던 입구 가까운 곳으로 적을 유인한 뒤에,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으로 텔레포트를 시전 한 것이었다.
“이런다고 도망칠 수 있어!?”
그래봤자 시간 벌기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목숨이 연장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쿤은 입을 꾹 다문채로 그저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먼 곳으로 쫓아버렸던 저 살기가 다시 그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 전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가, 다시 한 번 더 텔레포트를 시전 할 생각이었다. 충분한 시간벌이를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저 상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왕난은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채로 겁에 질려 소리쳤다.
“이봐, 쿤! 설마 에스컬레이터로 가려는 건 아니겠지! 네가 가장 위험한 통로라고 했던 말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얼마나 위험하든 지금보다 위험하겠냐! 어이, 이수!”
네 사람이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달리는 동안, 이미 이수의 옵저버는 제 역할을 시작하고 있었다. 두 개의 옵저버가 빠른 속도로 에스컬레이터 위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탐색을 시작했다.
“일단은 안전해 보여!”
“망설이지 마! 주춤거리면 잡힌…….”
“쿤!!”
이수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과 쿤이 머리를 숙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방금까지 쿤의 머리가 있던 곳을 거대한 창이 관통하며 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귀를 찢는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작게 진동했다. 이게 D급의 파괴력이라고? 말도 안 돼. 이건 거의 랭커 급이잖아. 쿤이 마른침을 삼키며 돌아본 곳에는, 이죽이며 웃음 짓는 그 녀석의 얼굴이 있었다. 거리를 좁혀온 것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그들이 있던 방의 입구에서부터 에스컬레이터 앞까지 먼 거리를 관통시키며 창을 날린 것이었다. 살기를 느껴 몸을 숙이지 않았다면 분명 저 파괴적인 창 앞에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정말이지 한순간도 긴장을 놓칠 수가 없었다. 왕난은 다리가 떨려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행을 바라보는 맹수 같은 눈동자가 그들을 사로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는 탓이었다. 그가 저벅 저벅 발소리를 내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 도망칠 수 있을까?”
“저런 건 등대로도 못 막아.”
쿤은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상황에 대해 시뮬레이션 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생각해보아도 모두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뭔가. 뭔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아주 작은 시간이라도 주어진다면 좋을 텐데. 입술을 깨물었지만 다가오는 맹수 앞에서는 작은 초식동물일 뿐이었다. 이수라고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이렇게나 먼 거리가 있는데 마치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그의 위압감에 눌려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나에 대해 그렇게 비하해놓고 한다는 짓이 고작 도망치기냐? 가소롭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성질만 돋웠지?”
이수가 난감하다는 듯 물었다. 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건물 어딘가에 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밤을 만나기도 전에 죽을 위기라니. 자신의 무력함에 신물이 났다. 고작 머리를 굴려 도망치는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 방법조차 아무런 소용없는 짓이었다니.이수도 왕난도, 하물며 자신의 목숨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밤을 지키겠다는 것인지 자조가 새어나왔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이 상황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생각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밤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이 자리에 밤이 있었다면 그는 이수도 왕난도 그리고 쿤 자신마저도 구해낸 뒤 자신이 목표하는 위를 향해 계속해서 올라갔을 것이다. 한없이 지켜줘야만 하는 대상이었던 밤은 어느 샌가 자기 자신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알지 못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눈앞에 나타나 언제나 동료들을 구하고 그들을 지켰다. 강해진 밤을 만난 뒤로는 언제나 지켜지는 일 뿐이었다. 시험의 층을 떠날 때, 밤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을 밤에게 떠넘긴 채 그를 따라가고 있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정도 적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밤과 함께 걸어가려면 적어도 밤에게 짐이 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쿤 가문의 가주를 노리는 쿤 아게로 아그니스가 겨우 이런 곳에서 정체도 알지 못하는 적에게 놀아나 목숨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쿤은 백천경을 꺼내들었다. 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수가 놀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쿤! 너 설마!”
“……저 녀석을 이 안에 가둬 볼 거야.”
“가능하다고 생각해? 저런 녀석에게 한 번이라도 검을 찔러 넣을 수 있다고?”
“그거야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지.”
“말도 안 돼는 소리 하지 마! 성공할 리가 없잖아!”
“…….”
아니. 실패할 리가 없었다. 아직 밤을 만나지 못했다. 아직 밤과 함께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이제야 겨우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되찾았는데, 이런 식으로 아무 것도 함께 해보지 못한 채로 죽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실패할 리가 없다.
“이 녀석은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십이수 너는 자왕난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 가. 이 쪽은 쓸데없이 어린애까지 한 명 붙어서 곤란한 상황이니까.”
“웃기지 마! 아, 네 그러십쇼! 하고 놔줄 것 같냐! 분명 다른 방법이…….”
“다른 방법 같은 건 없어!”
쿤은 정면을 응시한 채로 우두커니 서서 소리쳤다. 백천경을 움켜쥔 손바닥에 땀이 흘렀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제 이 방법뿐이야.”
쿤은 천천히 백천경을 들어올렸다. 딱 한 번이었다. 어떻게든 한 번만 검을 꽃아 넣을 수 있다면 그를 백천경 안에 가둘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번을 어떻게든 성공시키기만 한다면 분명…….
“……어이. 쿤.”
그러나 공기 중을 타고 흩날리는 이수의 묵직한 목소리는 쿤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두꺼운 손바닥으로 백천경을 들고 있는 쿤의 손목을 붙들었다.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돌려세우며 빠득하고 이를 갈았다.
“진심으로 죽고 싶은 거냐……?”
“죽긴 누가 죽는다고……!”
쿤이 이수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지만,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쿤과 이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쿤 일행을 향해 다가오던 적의 눈길도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해 돌아갔다.
“사, 사람이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
“뭐라고? 생존자가 있어!?”
한 무리의 선별인원들이었다. 위에서부터 내려왔는지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생존자들은 서로 연합을 이룬 것 같았다. 무리 안에는 경계심과 혼란과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적개심만은 보이지 않았다. 표식이 같은 자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상황에 처한 동지였다.
예상치 못한 무리의 등장에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살기는 갈 곳을 잃었다. 쿤 일행을 노리던 적은 멀리에 있는 쿤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잠시 찾아왔던 침묵과 평온은 태풍이 휩쓸고 지나기 전의 폭풍전야에 불과했다. 쿤은 내내 자신들을 향하고 있던 살기가, 입구에 등장한 나약한 무리들을 향해 돌아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끄, 끄아아아악!”
“도망쳐!!”
난데없는 공격이 시작됐다. 피바람이 몰아쳤다. 방 안에는 끔찍한 비명소리와 절규만이 가득했다. 몇몇은 한 데 뭉쳐 그를 상대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방 안에 들어섰던 사람들은 차례차례 목소리를 잃어갔다.
쿤은 백천경을 도로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명과 절규로부터 등을 돌렸다. 엔의 눈을 가린 채 돌아선 왕난을 잡아끌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바라보는 이수에게도 고갯짓을 했다. 쿤이 그토록 바랐던 작은 변화는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찾아왔다. 사실은 자신들이 맞이했을지도 모를 비참한 최후는, 이름도 포지션도 알지 못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신해주었다. 명복을 비는 일은 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살아남을 수는 없다. 쿤은 왕난의 손을 꼭 붙든 엔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자. 저 괴물 랭커가 다시 우리를 먹어치우러 오기 전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이수와 왕난은 쿤의 뒤를 따랐다. 눈앞에 놓인 것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뎌 걸어 가다보면 이와 같은 위험을 반드시 또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때에도 이런 운이 따라 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다음번의 어둠은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막막한 두려움이 꼬리처럼 뒤따르는 가운데, 네 사람은 캄캄한 에스컬레이터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으으…….”
한참 만에 눈을 떴다. 머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눈이 흐릿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밤은 두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눈을 비볐다.
“여기가 어디지……?”
온통 새하얀 벽뿐이었다. 하얀 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방 안은 화사하게 빛났다. 정면에는 48이라는 거대한 숫자 하나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밤은 쿵쿵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이 주변에 익숙해지자, 그 다음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겁에 질린 얼굴이다.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쿤이나 왕난이나 다들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분명 동료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밤은 근처에 있던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았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왜 이런 곳에서 깨어났는지, 이곳은 어딘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저기……, 말씀 좀…….”
“히익! 다가오지 마!!”
그러나 그 사람은 빠르게 등대를 펼치며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이라도 다가서면 공격하겠다는 강한 의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저 묻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는 밤이 자신의 적이라도 된 것 마냥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거의 비슷했다. 방 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강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릴 인벤토리와 옵저버를 꺼내들고 싸움을 벌일 태세였다.
“네 표식을 보여! 당장 보이지 않으면 죽이겠어!”
“너부터 표식을 보여!”
살기가 어린 외침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표식이라니 그게 뭐지. 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서로에게 검을 들이대는 이유가 그 표식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이마나 손목을 가리고 있는 사람도 제법 되었다. 사람들은 뭔가를 감추고 의심하면서 서로를 적대했다.
“저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요, 저는 당신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뿐이에요.
밤은 다시 자신을 경계하며 도망친 사람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가 경계하지 않도록 다가서지 않고, 제자리에 선 채로 곤란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상대에게는 어떻게 바라보아도 밤의 모습이 위협적인 모양이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오기만 해 봐!”
“알겠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을 게요. 하지만 제 얘기를 좀 들어주세요. 저는 밤이라고 해요. 제가 궁금한 건 저희가 왜 이런 곳에서…….”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조금 더 이 상황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과 함께 이곳을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밤의 사소한 바람은 그저 이상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높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이라고 해야 할지, 태풍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거대한 회오리가 방금까지 밤의 눈앞에 서있던 그 사람을 휘감았다. 보이지 않는 천장 끝까지 하늘로 치솟는다. 분명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사람의 생명이 꺼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한 명에서 그쳤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밤의 귓가에서부터 시작된 비명소리는 그를 시작으로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규칙도 없고 전조도 없었다. 바람기둥은 예고도 없이 바닥에서부터 솟아올라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도, 도망쳐!!”
누군가가 외침을 시작으로, 방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살길을 찾아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입구와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있던 소수의 사람들만 방 안을 빠져나갔을 뿐, 비명소리는 좀처럼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던 밤의 발치에서도 기운이 느껴졌다. 밤은 황급히 몸을 틀어 치솟는 바람을 피했다. 거대한 폭풍에 옷자락이 펄럭였고, 연기를 동반하는 뜨거운 기운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높은 온도의 열기를 품에 안은 수증기에 가까웠다.
밤은 주변을 살폈다. 가장 가까운 곳은 엘리베이터였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방 안에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엘리베이터 문을 억지로 개방하여 줄이나 벽을 잡고 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끈을 놓쳐 긴 비명과 함께 어두운 구멍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엘리베이터는 다행히 50층에 멈춰있어, 2개의 층을 내려오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앞다투어 안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 안에만 탈 수 있다면 방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밤도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위해 그곳을 향해 힘껏 달려갔지만, 아수라장이 된 사람들을 떨쳐내고 혼자서만 살아남을 배짱은 없었다.
“자, 잠깐! 이제 그만 타라고!”
“안돼!”
정원이 초과되어도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밀려드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얼굴을 짓밟고, 몸통을 짓밟고 꾸역꾸역 안으로 밀려들었다. 밤이 미처 그들 가까이로 가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사단은 벌어지고야 말았다.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엘리베이터는 쿵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기계를 지탱하던 끈이 차례차례 끊어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필사적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던 사람들은, 이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작은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얽혀버린 인간의 늪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밤은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절규와 공포로 얼룩진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빨리 제 손을 잡으세요. 그렇게 외쳤던 것 같다. 그러나 운명의 시간은 야속하게도 절규하는 생명에게 살아남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누군가와 손끝이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엘리베이터를 지탱하던 마지막 줄이 끊어졌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망울이 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데는 찰나의 시간조차 소비되지 않았다. 허공에 덩그러니 남은 밤의 손가락 마디 사이를 뜨거운 바람만이 스치고 지났다.
밤은 내밀었던 손으로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허망했다. 사방을 둘러싼 눈부신 하얀 벽만큼이나 허망하고, 또 허망한 일이었다. 살려달라고 손을 내밀던 사람들 중 단 한명의 손도 잡아주지 못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죽음 가까운 곳으로 그들을 보내버렸다. 왜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을까. 지금 이 순간에 침착하게 판단하고 행동해 줄 동료들이 함께 있었다면 조금은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쿤 씨…….”
밤은 쳐졌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웠던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졌다. 쿤 씨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침착하게 주변을 둘렀다. 어떤 이들은 살아서 방을 빠져나갔고, 어떤 이들은 바람에 휩쓸려 죽음을 맞았다. 또 어떤 이들은 돌아올 수 없는 어둠 저편으로 추락해버렸다. 이제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토록 처절했던 비명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동료들도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을지 몰랐다. 비록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은 구하지 못했지만, 동료들도 이곳 어딘가에 와있는 것이라면 그들을 찾아 지켜야만 했다. 지금의 할 일은 절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밤은 망연자실했던 표정을 지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아가야 할 길을 향한 결단은 언제나 그를 강하게 만들어왔다. 그는 푸르고 둥근 청노를 띄웠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락해 간 엘리베이터 속 어둠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동료들을 찾아 다시 만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스물다섯번째 밤의 유일한 목표였다.
* * *
“자왕난!”
쿤은 황급히 손을 뻗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리가 멈추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을 향해 달리던 왕난이 6층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에스컬레이터와 방을 단절시키려는 듯 거대한 철문이 내려섰다. 쿤은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무작정 몸을 던졌다. 쿵!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닫힌 뒤에서야 왕난과 자신 둘만이 6층의 방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떨결에 들어오긴 했는데, 아직 철문의 바깥에는 십이수와 엔이 남아있었다.
“젠장! 함정인가?”
“쿤! 자왕난! 무사하냐!?”
철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에서부터 이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쿤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대꾸했다.
“아아. 여긴 둘 다 괜찮아. 거긴?”
“여기도 이상 없어! 문은 이 쪽에서 부숴볼까?”
이수는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올 기세였다. 그러나 쿤은 철문이 바닥으로 내려오던 순간의 무게와 두께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을 부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알 수 없어. 꾸물거리는 사이에 아래층에서 그 괴물 랭커가 쫓아올 지도 모르잖아.너는 엔기스를 데리고 그대로 7층으로 올라가. 여긴 나랑 자왕난이 알아서 탈출해 볼 테니까.”
“좋아. 그럼 7층에서 만나자!”
이수는 대답을 마치자마자 엔기스와 함께 위층으로 올랐다. 아무리 십이수가 D급 선별인원이라고는 해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한 시라도 빨리 그들과 합류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자, 그럼 우리도 가볼까?”
쿤은 왕난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으아, 쿤. 우리 지금 제대로 함정에 걸린 것 맞지!?”
쿤을 따라 돌아선 왕난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되물었다. 쿤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들어선 방은 하나의 거대한 미로였다. 높고 하얀 벽으로 가로막힌 어두운 길은 알 수 없는 방향을 향해 수 갈래로 갈라져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든지, 거쳐 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쿤은 한 번 쓰게 웃고는 어둠이 가득한 미로를 매섭게 응시했다.
부디 이 미로의 끝에서는 밤을 만날 수 있기를,
두 사람은 간절한 소원을 품에 안으며, 천천히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04. 끝. -
<건물의 평면도 - 엘레베이터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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