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성 경위님 생일축하! 글상자/City of mist2013. 9. 11. 14:49
# 회색도시 하태성 생일축전 글입니다
# 요찌님이 꼭 써야 한다고 막 협박해서 우여곡절 썼습니다 요찌님께 드립미다 !
찬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들어와 양시백은 옷깃을 여몄다.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은 가을 문턱이건만 서늘함에 몸이 잔뜩 움츠러든다. 뜨거운 햇살로 가득하던 공기는 눈치 채지 못할 사이에 다가온 가을에 주눅이 들었다. 벌써 추위가 되돌아온다. 저마다의 가슴에 새긴 그 날의 사건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았건만, 시간은 멈추지 않고 제 길을 걸어 다시 1년을 채워간다.
양시백은 탁하게 웃으며 어두운 골목길을 응시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 지도 벌써 1년이 되어간다. 회색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파묻혀 시간을 흘려보내다보니 벌써 여기까지 왔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는 행적을 추적하기 어려웠다. 이제는 그 날 자신에게 들려주던 부탁의 목소리도, 그 목소리만 남기고 떠난 유상일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건만, 그가 남긴 부탁만이 시간 속에 남아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왔다.
그 동안은 멀찍이서 바라만 보던 집 안에 발길을 들였다. 어머니가 죽고 하태성이 그렇게 사라진 뒤로, 이 집을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비어버린 집을 정돈하기 위해 자신과 권혜연 순경이 들렀던 작년 겨울의 방문이 전부였다. 이후로 아무도 찾지 않은 채 양시백의 눈길만을 받아온 집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수북한 먼지뿐이다. 집이야 하태성의 명의로 되어있어 아직까지 건재하다고 하지만 전기나 수도는 끊긴지 오래였다. 양시백은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단칸방의 장지문을 열었다. 천장에 매달린 거미줄을 걷고 썩어가는 작은 식탁을 가져와 펴고 그 위에는 케이크상자를 올렸다.
“무슨…맛을 좋아할지 몰라서 가장 무난한 것으로 해봤어.”
생크림으로 범벅이 된 빵 위에 작은 초 하나를 꼽는다. 하얗게 미끄러져 가는 것이 그 녀석의 머릿결을 닮았다. 성냥의 마찰면이 거칠게 문질러지며 불꽃을 틔우자 그것을 조심스럽게 심지 끝에 올렸다. 어둡던 방안에 촛불이 밝혀져 빛으로 일렁인다. 녀석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살았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이 도시 어딘가에 홀로 숨어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무게를 짊어지고 그 길을 걷고 있는지도.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자신의 삶을 축복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에.
“생일…축하해.”
양시백은 쓸쓸히 웃으며 그를 축복했다.
그 언젠가의 날에는 그의 분명한 호흡을 맞대고 설 수 있기를. 텅 빈 방안에 홀로 타오르는 이 촛불이 그가 선택한 길 앞에 빛이 되어 주기를 바라며, 그는 어둠으로 가득 찬 집 안에 한줄기 불꽃을 가득히 피웠다.
* * *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붙잡아 일으켰다. 아직 여기에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다.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시야를 몇 번이고 다그쳐세웠다. 오랜 시간 도망친 덕에 숨은 목까지 차오르고 폐는 터질 것처럼 아프다. 하태성은 다친 팔을 부여잡고 발을 절룩이며 힘겹게 몸을 끌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떠올라 되도록 이 장소에는 오지 않으려 했건만 오늘처럼 급박한 상황은 처음인지라 저도 모르게 익숙한 길을 선택해버렸다. 자신이 어떤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하태성은 어머니와 줄곧 함께 살았던 집의 문을 열고 뛰쳐들었다. 임기응변이었으나 집 안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나 아무도 없어야 할 공간에, 어둠만이 자신을 반겼어야 할 공간에서 느껴지는 불빛에 하태성은 몸을 떨었다. 누군가 있나? 아니, 사람의 기척은 아니었다. 하태성은 천천히 장지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일렁임에 시선을 빼앗겨 숨을 멈췄다.
‘생일…축하해.’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홀로 타들어가는 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심지가 녹아내려 촛농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케이크 위에 짧디 짧은 초 하나가 꽂혀있었다. 돌아갈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태어난 날 같은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생일도. 세상에는 이런 축복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하태성은 힘이 풀린 다리로 문지방에 주저앉았다. 방금까지 앉아있던 누군가의 체온으로 데워져 따뜻하다. 긴 침묵이 흐른다. 소리 없이 타들어가는 초가 점점 더 짧아졌다. 가만히 입김을 불었다. 작은 공간을 환히 밝히던 빛이 사그라진다. 그러나 어둠에 잠긴 어머니의 방 안에서는 여전히 같은 온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쓰러지듯 바닥에 누웠다.
고마워. 내게 길을 알려줘서.
어둠에 삼켜질 뻔한 나에게 다시 한 번 길을 열어주어서.
들리지 않을 대답을 허공위로 흩날리며, 하태성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