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요시 합작 참여글 글상자/Kuroko's basket2013. 9. 10. 23:10
# 키요시 합작에 "하얀색"을 주제로 참여했던 글입니다.
# 목일로 연성연성
# 다른 합작글을 보시려면 여기로 >> http://kiyoshi.er.ro/
키요시 합작 참여글
by. Bido Enhuki.
“어, 왔냐.”
현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퉁명한 것인지 친절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휴가의 목소리와 달콤하게 풍겨오는 밥 냄새였다. 달짝지근한 향기 속에 섞인 국 끓는 소리가 정겹다. 평소에 자주 드나들던 곳이지만 코끝을 자극하는 낯선 음식 내음에 쉽사리 발길이 들여지지 않는다. 휴가, 하고 작게 부르자 불쑥 눈앞으로 내밀어진 주걱에는 설기설기 흰 밥알이 묻어있었다.
“뭘 그렇게 뜸을 들여. 빨리 들어오지 않고.”
“하하. 그럼 실례.”
오늘따라 떨어지지 않으려는 쑥스러운 걸음을 달래 억지로 거실을 디딘다. 평소와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앞서가는 휴가의 등이 낯설어 키요시는 머리를 긁적였다.
“부모님은?”
“나가셨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맘 놓고 들어와.”
“흐음, 뭘 하고 있었는데?”
평소처럼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방으로 향하는 휴가의 걸음을 뒤따르며 키요시가 물었다. 이미 집안 가득히 흘러넘치는 향기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 휴가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생소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면 몰라?”
그런 키요시를 슬쩍 돌아보며 던진 휴가의 한 마디가 그의 생소함을 선명한 형태의 확신으로 바꾼다.
“……밥한다.”
“…….”
정말로 밥? 그 휴가가? 지금 당장 집으로 놀러오라고 연락을 할 때부터 수상하긴 했지만, 막상 달려와 보니 떠안겨진 상황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장면 앞에서 키요시는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침묵으로 돌아서는 휴가와 키요시 사이에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의 요동만이 가득했다. 키요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냄비로 향했다가, 차오른 뚜껑을 열어 거품을 걷어내는 휴가의 손끝에 닿는다. 작은 숟가락으로 맛을 보고 소금통을 열어 간을 맞추는 휴가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 그 하얗고 긴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귓등은 붉은 봉선화처럼 물들어간다.
아아, 그래. 그렇구나. 당황함으로 얼룩져있던 키요시의 얼굴이 희미하게 풀어졌다. 처음부터 휴가와는 말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이 아닌 다른 형태로 충분히 전해지고 있다고 여겼기에 구태여 남기지 않아 왔다. 서로의 아픔에 대해 굳이 정형화된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무언의 약속이었다. 이미 눈짓으로 넘기는 패스의 짧은 여운 속에, 퉁명스럽게 건넨 커피 캔 한 잔 속에, 점심시간마다 들려주는 하모니카 연주소리에, 그리고 이렇게 함께 먹는 한 끼의 식사 위에서 풍성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키요시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의아한 눈빛도, 당황하는 표정도 싣지 않았다. 이제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정확한지도 몰랐다. 그는 그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고 식탁에 앉아, 부드러움이 실린 눈빛으로 휴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요리를 할 때는 앞치마 정도는 해야지, 휴가.”
“됐어. 그런 건 거추장스러워.”
“내가 해줄까?”
“맞을래?”
한 손에 주걱을 들고 휙 돌아보는 휴가의 표정이 지나치게 살벌해 키요시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제대로 맞춰온 듯 키요시가 식탁에 앉자마자 뜨끈한 국이며 솜씨를 발휘한 반찬거리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수저와 앞접시가 놓이고 그 옆에는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물 한 컵이 들어섰다. 아까부터 들고 다니던 주걱은 의외로 가장 마지막에 사용됐다. 휴가가 탁 소리가 나게끔 키요시의 앞에 김이 나는 밥 한 그릇을 내려놓는다.
“설마… 먹고 죽지는 않겠지?”
“내가 리코냐?”
농담같은 실갱이를 터트리며 키요시는 웃었다. 평소 그의 식성에 맞춰 적당량으로 담긴 흰 쌀밥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건강에 좋다는 잡곡이나 콩 같은 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천연의 쌀 그대로에서 휴가의 서투름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키요시는 젓가락을 들었다. 큼지막하게 떠서 한웅큼을 입으로 가져갔다. 쌀밥 특유의 단내음이 혀끝을 타고 입안 가득히 퍼져간다.
누군가가, 가까운 사람이 해준 밥을 먹는 게 얼마만이더라. 줄곧 무릎의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는 동안 먹었던 병원밥은 인위적인 단맛에 물들어 차가웠다. 병원이라는 곳이 어딘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하루하루 숨통을 죄여오는 것 같은 그 하얀색은 제법 섬칫하게 느껴진다. 싸늘하게 치장된 병실의 하얀 벽지와 바닥의 타일들, 입고 있는 옷이나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되어주었던 창틀까지도,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 없는 깨끗한 색을 품고 있었다. 가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하얗게 내리쬐던 형광등 불빛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어 항시 머물 수 없었기에 덩그러니 놓인 병원밥은 혼자 먹는 날이 많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 하얀 밥에는 이제 신물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먹을만 하냐?”
마주 앉아 턱을 괴곤, 퉁명스럽게 물어오는 휴가의 표정은 딱히 부드럽다거나 다정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가 건네준 하얀 밥에서는 여전히 온기가 피어올랐다. 하얀 것은 온통 차갑게 식어가는 두려움의 일환인 줄 알았건만, 세상에는 이렇게 따뜻한 깨끗함도 존재하고 있다.
“흐훠어!”
“…? 뭐라고?”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어오는 휴가의 찌푸려진 미간에도 여전히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온기가 묻어있다고. 키요시는 입안을 맴도는 단 맛을 힘껏 삼키며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
뜨거워, 휴가.
하얗게 물든 한 톨의 밥알도, 하얗게 빛나는 너의 마음도.
하얗게 하얗게 세상을 채워가는 이 식탁 위의 작은 온기마저도.
들리지 않을 말이 무엇을 타고 전해졌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그에게 닿은 것인지 휴가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휴가의 찌푸려진 미소는 서투름마저도 전부 그 하얀 밥 아래 묻혀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식탁 위로 스며드는 하얀 온기가 뜨겁다. 차갑게 식어버렸던 두터운 벽의 아픔마저도 시원스레 태워 줄 것처럼.
고마워, 휴가.
그 날 함께 먹은 밥은 정말로 맛이 있었다.
생각하면 눈물이 날 만큼,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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