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쿤(밤쿤)] 표식 1장 - 02 글상자/└표식(연재중)2016. 8. 6. 23:45
* 밤쿤 (올레쿤) 중심의, 원작세계 기반 서바이벌 스토리입니다.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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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일러스트는 요찌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장. 첫째 날
- 02 -
계단의 조명은 눈이 침침해질 만큼 어두웠고, 한 층의 높이는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길었다.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것이 땀인지 아니면 방금까지 죽음의 근처까지 데려다주었던 물의 흔적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제일 앞에서 걷고 있는 파도잡이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묵묵히 계단을 올랐고, 그 뒤를 따르는 쿤 역시 자신만의 복잡한 생각 속을 거닐고 있었다. 쿤의 곁에 선 회색머리의 소년은 불안감이 서린 눈빛으로 왕난을 경계했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흠칫 놀라는 소년의 태도에 왕난의 눈빛에는 곤란함이 서렸다. 마침내 그가 가라앉은 침묵을 깨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
왕난은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던진 채 머리를 긁적였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그랬을 거야.”
부디 진심어린 결심이 전해졌기를. 소년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잠시 고개를 들었지만 아까부터 계속 된 어깨의 작은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왕난은 소년의 꾹 움켜쥔 주먹 위로 눈길을 던졌다. 저 손바닥에 있던 문장은 분명 자신의 팔뚝에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표식이 같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죽어야만 이 정신 나간 건물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린 아이조차 그런 룰 안에 있어야 하다니 너무나 잔혹했다. 무서울 터였다. 자신의 가장 위험한 적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안심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런 소년이 아니라 거대한 등치에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괴물이 짝이었다면 왕난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앞 쪽의 걸음이 멈췄다. 다음 층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쿤의 어깨너머로 커다란 회색의 철문이 보였다. 아래층에서는 폭발하는 바람에 살펴보지 못했는데 단조롭고 밋밋한 모양이었다. 정면에 4라는 글자가 하나 적혀있는 것 말고는 특이한 점도 없었다. 손잡이는 돌려서 여는 형식이었고 열쇠구멍 같은 것은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문을 바라보던 파도잡이는 잠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실력이 나쁘지 않은 것 같던데 나와 함께 팀을 짤 생각은 없나?”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검은 그림자의 공격을 단번에 파악해 몸을 대피한 것도 그렇고 방을 세 개나 다룰 수 있는 선별인원이라면 제법 도움이 될 지도 몰랐다. 이쪽에는 어린 아이도 있어 서로를 지켜줄 강한 동료와 함께 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왕난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거절한다.”
쿤이 잠시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파도잡이가 눈살을 찌푸려 미간에 주름이 생겼지만 쿤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혼자서만 도망치는 재주가 있더군. 동료를 버리고 가는 놈에게 목숨을 맡길 수야 없지. 가장 다급한 순간에 버려질 테니 말이야.”
“동료라. 너야말로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군. 하지만 그런 소수의 인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나? 너희는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한 편이 되어줄 팀을 구성해서 닥치는 대로 표식을 확인해보고, 나와 같은 표식을 찾아 죽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길이다. 설마 아무도 죽이지 않고 탈출하겠다는 식의 무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파도잡이의 비꼬는 시선이 왕난을 향했다. 같은 표식을 눈앞에 두고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한 명백한 질타였다. 왕난은 그를 향해 한 소리를 날리려 들었지만 쿤이 손을 뻗어 앞을 막았다. 그의 입가에서 피식, 하고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멍청한 녀석이라면 잘 모르겠지만 난 봐주는 취미 없어. 내 표식을 가진 자는 내 힘으로 죽인다. 그러니 넌 네 걱정이나 하시지.”
쿤이 그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문을 열고 들어갈 줄 알았는데 4층의 문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음 층으로 계단을 올랐다. 왕난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등에 대고 입을 열었다.
“여기에는 들어가지 않는 거야?”
쿤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 비친 것이 어떤 감정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왕난이 있는 곳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쉬지 말고 따라와. 우리는 다음 층으로 간다.”
이렇게 무작정 계단을 올라가도 되는 건가? 의문을 갖는 사이 쿤은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며 파도잡이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리고 거기 너, 한 가지 충고하는데 그 문은 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내가 왜 네 말을 따라야하지? 난 이래보여도 D급 선별인원이다. 너희 같은 잔챙이와는 급이 다르다고.”
“D급!?”
왕난이 놀라 소리쳤지만 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걸음을 재개한다. 회색머리의 소년이 망설임 없이 쿤의 뒤를 따랐다. 이쪽에는 같은 표식을 가진 왕난이 있어 어쩌면 파도잡이를 따라갈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소년에게도 파도잡이는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인 것 같았다. 왕난은 파도잡이와 쿤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이내 앞서간 동료들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어이, 쿤. 이대로 꼭대기까지 올라갈 참이야? 계단에서 적을 만나면 피할 곳도 없는데 이렇게 무작정 올라가도 괜찮은 거냐?”
“웬일로 머리를 좀 썼네? 맞아. 계단이라는 곳은 전투를 하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지. 무작정 올라가지 않을 거야. 휴식은 다음 층에서 갖는다.”
“그래야하는 이유라도……?”
왕난의 질문에 대한 답이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난데없이 비명이 울렸다. 아래층에서부터 퍼져오는 고성이 어두운 계단을 타고 올라와 왕난의 머릿결을 스치고 그의 온 몸을 두드린다. 털이 곤두섰다. 처절하면서도 섬뜩했다. 왕난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섰고, 소년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방금 전 까지 함께 있었던 파도잡이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함부로 문을 열지 말라던 쿤의 경고가 스쳐지나갔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아까도 말했잖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 내려왔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 방을 탈출할 때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이럴 경우 위 쪽 어딘가에서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되지.”
“하지만 그 위험한 장소가 4층이라고 어떻게 단언했어? 그보다 더 위 쪽의 다른 층이었을 수도 있잖아.”
“맞아. 4층의 문을 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어.”
“문?”
왕난은 방금 전 눈에 담았던 문의 모습을 떠올렸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보아도 지극히 평범한 문이었다. 장치나 함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오롯이 닫혀있을 뿐이었다.
“아!”
불현 듯 왕난의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문이 닫혀있었다. 바로 그 지점이 중요한 것이었다. 왕난의 생각을 읽었는지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급하게 탈출을 시도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달려가게 될 만한 곳은 어딜까?”
“눈앞에 바로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라고 아까 네가 그랬잖아.”
“맞아. 하지만 에스컬레이터로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없거나, 에스컬레이터가 너무 멀리 있거나 아니면 에스컬레이터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어디로 갈 것 같아?”
왕난은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쿤이 달려가던 곳을 떠올렸다.
“문이 있는 방향이겠지.”
“바로 그거야. 저 방이 멀쩡한 곳이었다면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거야. 그리고 1층에 있을 현관을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왔겠지.”
“하지만 문은 닫혀 있었고?”
“그래. 어쩌면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얌전히 문을 닫고 나올 정신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말이야.”
“몰살…인건가.”
왕난은 자신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왔다면 그 뒤의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4층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쿤의 판단에 한없는 신뢰가 생긴다. 게임이 시작된 지 몇 분 만에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죽음의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 파도잡이의 비명이 아직까지도 들려오는 것처럼 귀가 먹먹해졌다. 절로 마른 침이 넘어가고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어둠을 채우는 고요함이 다시 찾아왔다. 계단에는 세 사람의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죽었을까?”
파도잡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왕난의 근심어린 목소리에 소년이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쿤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알 수 없지. 하지만 D급 선별인원이 그렇게 쉽게 목숨을 잃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그건 그렇네.”
D급 선별인원이라……. 갈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쿤과 왕난이 모두와 함께 놀러갔던 놀이공원은 E급 선별인원들의 구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만 납치를 당했다면 이 건물에 D급 선별인원이 존재할 수 없어야했다. 하지만 분명 파도잡이는 자신을 D급 선별인원이라고 지칭했다.
“어쩌면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인 납치가 진행됐던 건지도 모르겠군. D급 선별인원이 더 있을 수도 있겠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E급과 D급을 한 울타리에 넣어두고 어떻게 상대를 하라는 거야!”
E급 선별인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20층 통과지점조차도 수많은 낙방의 쓴 맛을 본 후에야 간신히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런데D급이라니.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장소이긴 해도 아직까지 피부로는 와 닿지 않는 위치였다. 얼마나 강한지, 또 얼마나 위협적인지 피부로 체감되지 않았다. 다만, 두려운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쿤의 가라앉은 눈빛 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막막함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꾸했다.
“글쎄. 하지만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어. 죽이고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
“너, 같은 표식이 있는 사람을 죽일 생각이야?”
왕난이 놀라 물었다. 그러나 쿤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잊었던 고요함이 찾아와 계단을 오르는 구두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왕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회색머리의 소년에게로 향했다. 죽인다니.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직 이름도 모른 채였다. 그는 조금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저기, 이름이 뭐야?”
소년이 눈에 띠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왕난에게서 가급적 멀리 떨어지려 애써왔던 그의 눈빛은 공포에 질려 떨리고 있었다. 소년은 최대한 쿤에게로 바짝 붙으며 시선을 돌렸다.
“…엔.”
“엔?”
“엔기스…요. 다들 엔이라고 부르지만.”
가까스로 입을 열어준다. 아직은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지만 답을 주는 것만으로 왠지 웃음이 올라왔다.
“엔기스라. 그래, 엔이구나.”
역시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조용히 이름을 소개하는 이 소년의 목숨을 빼앗을 자신이 없었다. 어딘가에는 표식이 같은 자를 죽이지 않아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직 72시간이라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위기가 찾아온다면 다시 그때가서 생각하면 될 뿐이었다.
“왕난.”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 찰나, 쿤의 움직임이 멈췄다. 몸을 낮추더니 조심스럽게 벽 쪽으로 붙는다. 왕난은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몇 걸음 앞이 5층이었고 이번에는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쿤의 말대로 이 방의 사람들은 문을 통해 밖으로 도망친 것 같았다. 그러나 올라오는 동안 마주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걸 생각하면 여전히 의심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쿤은 동태를 살펴 볼 작정인지 등대 하나를 띄운 뒤 가만히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어때?”
잠깐의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왕난이 속삭였다. 쿤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고도 섬세하게 움직인다. 또 다른 등대로 방 안의 화면을 전달받으며 구석구석 살펴보길 한참이었다. 슬슬 지루하다 싶을 때 쯤, 쿤이 맥없이 긴장을 풀었다.
“뭔가 있기에 경계했는데 이미 죽었군.”
“죽어!?”
쿤은 왕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왕난과 엔이 헐레벌떡 그 뒤를 따랐다.
“어이, 쿤!”
“…이 방에 누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굉장한 실력자인건 틀림없겠어.”
그는 문가에 멈춰 있었다. 방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쿤이 뱉은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거대한 짐승이었다. 그것을 신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괴물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거대한 생명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풍채를 고스란히 맞이해야 했다면 압박감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쿤의 말대로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지금은 분명 살아있지 않았다.
“시험의 층에서 황소라는 괴물을 본 적이 있어. 그런데 이 짐승에게서는 그것보다도 더 위험한 냄새가 나는군.”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이 아니었다면 괴물이 자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방 안에 가득한 전투의 흔적과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괴물의 모습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왕난은 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쨌든 저런 괴물과 싸우지 않게 되어 다행이야.”
“과연 그럴까? 저런 괴물조차 죽일 수 있는 또 다른 괴물이 근처에서 돌아다닐지도 모르는데?”
“제발 그게 비올레였으면 좋겠다. 어쨌든 이제 좀 쉬어도 되는 거지?”
“…비올레라.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쿤이 조용하게 대답을 흘렸다. 시작부터 달리고 싸우고 긴장하느라 여태 쉴 틈이 없었다. 왕난은 대답도 듣지 않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시간이 허락 된다면 잠이라도 한 숨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쿤도 이 장소가 안전하다고 판단했는지 그의 곁에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좀 차분하게 생각이란 걸 정리해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눈치를 보던 엔이 쭈뼛거리며 쿤의 옆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자 회색의 머릿결이 찰랑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난은 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그는 말끝을 흐렸다. 시작부터 결연히 나서기에 뭔가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쿤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간신히 대답을 붙였다.
“애초부터 탈출할 수 있는 문이라는 게 1층에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물바다가 되는 바람에 아래층으로는 갈 수 없게 되었으니 포기해야겠지. 건물을 나가는 게 목적이라면 간단해. 옥상으로 탈출하자.”
“역시 꼭대기인가?”
엘리베이터에 표시 된 숫자로 추측하자면 이 건물의 꼭대기는 50층이었다. 어린 소년을 데리고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왕난의 염려 섞인 시선이 엔에게 닿았다. 엔은 쿤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탈출을 염두 했을 때의 이야기야. 가장 좋은 건 역시 표식이 같은 자를 찾아내서 죽이는 거겠지.”
쿤의 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왕난은 그와 같은 눈빛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쿤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눈을 뜨자마자 날카로운 침을 목에 겨누던 살기어린 시선이 공포스럽게 떠올랐다. 그때에나 지금이나, 쿤의 판단은 언제나 냉철하다. 왕난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데에는 동의해.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아.”
“탑을 올라가면서 사망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건 너도 알고 있잖아?”
쿤이 핵심을 짚으며 물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방’ 시험 때에 시험담당이었던 러브도 같은 것을 말했다. 그러나 왕난이 하고 싶었던 대답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엔기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에게서 니아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짓고 있는 자신 없는 표정마저 그를 떠올리게 했다. 가장 지켜줘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키지 못했다. 어떤 변명을 가져다 붙인다고 해도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잔인하게 죽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함께 탑을 오르며 즐거운 기억을 나눴을 것이다. 툭, 하고 웃음을 터트릴 때의 니아가 얼마나 기뻐보였는지를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끝까지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난 그저 함께 탕수육 먹을 친구들을 잃고 싶지 않을 뿐이야.”
단지 그뿐인데 그 간단한 소원이 왜 그리도 어려운 걸까. 탑이라는 곳은 참 부조리하다. 얼핏 보면 위로 향하는 강한 자들에게 그만한 대가가 주어지니 공평한 것 같으면서도, 위로 향하기 위해서는 소중한 것을 끝없이 버려야만 하는 곳이었다. 한없이 왜곡되어있고 비틀어져있다. 이 낯선 건물 역시 탑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진절머리가 날 만큼 모순적이다.
“게다가 이건 정당하게 치르는 시험도 아니잖아. 여기 오지 않았다면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그래서 표식이 눈앞에 있는데도 죽이지 않겠다?”
“그래.”
왕난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쿤의 살기어린 눈빛이 진심인 것처럼, 왕난의 결심도 진심이었다. 끝까지 한심하게 바라본다 해도 굽힐 생각은 없었다.
“끝까지 함께 살아남겠어.”
“난 탑에 들어오자마자 에반켈의 층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400명의 선별인원을 200명이 될 때까지 줄여라’라는 시험을 받은 적이 있어.”
그러나 쿤은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들먹였다. 그가 흘리는 한숨이 어쩐지 무겁게만 느껴졌다. 쿤은 더 이상 왕난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꺼내기라도 하는 듯이, 아니 어쩌면 아껴두고 싶은 추억을 풀어놓기라도 하는 것처럼,조심스럽게 지나간 시간을 들춰냈다.
“그 당시의 선별인원들은 모두 그 시험을 치렀고, 200명이 되어서야 시험은 멈췄지. 죽이고 죽는 것은 탑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야.”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때의 쿤은 ‘죽이는’ 선택이 아니라 ‘동료를 만드는’ 선택을 했다. 그 결과 가장 소중한 밤을 만났고 라크를 만났고 동료가 되었다. 만약 그 때 동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선택을 했다면, 자신의 손으로 밤을 죽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극적인 살의보다 나은 선택도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탑이 아무리 잔혹한 곳이라 해도, 사람을, 그것도 어린 아이를 눈앞에 두고 죽이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하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쿤에게는 그때와 같은 여유가 없었다.
“넌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에서 살아 나가야만 해. 이 탑의 바깥으로 나아가서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이 있으니까. 너도 그러고 싶다면 각오를 해야 하지 않을까?”
덤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대한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최면과도 같았다. 딱 한 번만 자신의 인간성으로부터 눈을 감고 도망치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한 명만 찾아 죽이고 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라헬을 잡는 것도, 밤과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것도, 탑의 끝까지 올라 쿤 가문의 가주가 되는 것도, 가능해진다. 목숨이 걸린 일 앞에서 모든 사람의 편의를 봐 줘가며 인심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것은 이 미쳐있는 건물을 탈출해야만 바랄 수 있는 일들이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쿤이 눈을 들어 왕난을 마주했을 때, 그의 눈빛은 여전히 견고했다.
“못하는 게 아니야. 안 하는 거야.”
쿤은 물끄러미 그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짝이 눈앞에 있고 그것이 연약한 아이인데도 죽이지 않겠다고 하는 그의 결심이 바보 같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부러울 만큼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남을 죽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오히려 죽이지 않는 편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왕난은 그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뭐 하던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멋대로 이런 상황에 몰아넣어 놓고 무조건 죽이라니 웃기지 말라고 해. 그런 게 규칙이라면 내가 무너뜨려 보이겠어. 죽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겨우 50층짜리 건물 하나 탈출하지 못해서야 자왕난의 이름이 운다고! 녀석들이 정한 방법은 따르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자력으로 탈출해 보일 거라고!”
그가 꾹 움켜쥔 주먹에 열기가 서려있다. 왕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마냥 이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 엔기스의 마음에는 닿은 모양이었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한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왕난에게 부딪치며 작게 흔들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아이가 이해하기란 더욱 어렵겠지. 상황은 변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마음이 후련해진다. 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끝까지 그런 생각이라면, 좋아. 나도 고분고분하게 녀석들의 룰에 따라야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던 차였으니까. 하는 수 없지. 네 그 바보 같은 생각에 어울려주겠어.”
“쿤……!”
왕난의 감동적인 눈빛을 받으며 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자락을 흩날리며 흘려보낸 미소가 등대의 푸른빛을 따라 노래하듯이 부서졌다.
“이 게임의 룰을, 지배해주겠어.”
찰랑이는 머리카락 사이에 드러난 눈빛이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정면을 응시하는 견고함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가라앉았던 어둠이 걷히고 빛나는 활기가 찾아왔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며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왕난이 활기찬 표정으로 쿤을 따라 일어섰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두 사람의 의지가 이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대로 견고함이 이어졌더라면.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온 살기는 공중의 바람을 가르며 날아와 빛나는 단단함을 무너뜨렸다. 날카롭게 갈린 나이프가 향하는 곳은 엔기스의 얼굴 정면이었다.
“트리플 필드 전개!”
쿤이 재빠르게 등대를 펼쳤다.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강한 살기에는 죽음의 냄새가 실려 있었다. 떨어지는 무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차다. 쿤이 이를 악물며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대로 만든 결계가 챙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고작 날아드는 방향을 바꾼 것이 전부였다. 나이프는 쿤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 거대한 굉음을 내며 벽에 처박혔다. 작은 나이프일 뿐인데 절망적인 힘의 격차가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쿤은 긴장감을 가득 담은 채 소리쳤다.
“어떤 녀석이냐!”
“…….”
괴물 같은 생물체가 있던 방향이었다. 생명을 잃어버린 거대한 고깃덩어리 사이에서 그림자 하나가 꿈틀거리더니 느리게 일어선다. 등대로 살폈을 때는 커다란 괴물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쿤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단지 일어섰을 뿐인데 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살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주서는 것만으로 온 몸의 털이 곤두선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를 만났을 때보다 두려운, 죽음의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커다란 등치를 한낱 고깃덩이로 만든 것이 바로 그의 솜씨인 것 같았다.
“어떤 녀석이냐니?”
그는 다 드러난 뱃살을 긁적이며 하품을 했다. 전신에서 흐르는 살기가 아니었다면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쯤으로 여겼을 지도 몰랐다. 그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지. 뭐하는 놈들이냐, 너희는?”
D급 선별인원일까. 그것 말고 다른 루트는 없어보였다. 거대한 생물이 쉽게 제압당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지친 마음에 경계심을 풀어버렸던 자신을 자책하며, 쿤은 등대를 가까이로 불러들였다.
“그저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다. 계속 지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뭐야, 지나가겠다고? 기껏 잠이 들었는데 깨워놓고 그냥 지나가겠다고? 너희가 나를 쓸데없이 깨웠단 말이다! 알겠어? 아직 더 자고 싶은 나를 깨웠단 말이다!”
녀석이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이가 없어 왕난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오는 건가? 정신 나간 녀석이군.”
“왕난!”
위기감을 의식한 쿤이 소리쳤다. 그 거물의 시선이 왕난에게로 옮겨왔다. 과거에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지게나의 꽃 시험에서 우렉 마지노와 마주쳤을 때였다. 마치 그때와 같은 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나 위험도라면 명백히 눈앞의 녀석이 더 높아보였다. 왕난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에서 막 깨어난 그 맹수는 생기 없이 주머니를 뒤척이더니 나이프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런 상황? 이런 상황이 뭘 말하는 걸까나? 이런 상황엔 뭘 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 걱정하지 마시고 늬들 상황이나 걱정하시지.”
“온다! 조심해!”
“아마도 여기서 다 죽어버릴 테니까 말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한 번의 살기가 날아들었다. 폭풍 같은 바람이었다. 왕난은 두 팔로 얼굴을 가렸고 엔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쿤은 두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쓰며 등대를 불러들였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공기에 머리카락과 옷가지가 거칠게 나부꼈다. 눈을 뜰 수가 없어 어디에서 공격이 오고 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로 죽는다. 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절망이 쿤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어둠은 반갑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한다.
오직 그 염원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쿤의 온 몸을 지배해버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정적이 찾아왔다. 나부끼던 바람도, 몰아치던 폭풍도 없었다. 방 안은 고요하고 매우 깊었다. 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무턱대고 공격을 날렸던 적도 마찬가지였다. 한차례 거칠게 부딪쳤던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커다란 창 하나만이 꽂혀있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은 창이었다. 쿤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등 뒤에서, 열려있는 문 너머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발을 디뎠다.
쿤이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십이수……?”
- 02. 끝 -
<건물의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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