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고키) 글상자/Inazma 112013. 9. 10. 22:56
# 이나Go 41화 보고 완전 열받아서 썼던 조각글
# 고엔지는 반성해야 해요 고엔지가 나빴네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 렙파가 고엔지를 부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엔도하고 찌잉- 하는 걸 많이 만들어주어서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그 바람에 '브레이크조'라는 이름으로 묶여버린 세 사람에서 키도가 도태되는 일이 종종 발생해서
그럴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이건 나를 위한 위안의 글.. 그리고 키도를 위한 위안의 글..
키도야 힘내...!
메아리
(성제x키도)
by. Bido Enhuki
나는 이나즈마 캐러밴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묵묵히 응시했다. 결승전이라는 무게감 때문인지,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대화는 제법 가라앉아있었다. 평소라면 가장 먼저 나서서 유쾌한 말들을 쏟아냈을 텐마마저 입을 꾹 다문채 주먹만 쥐었다폈다를 반복한다. 간간히 말을 걸어오는 신스케에게 짧게 대꾸하거나, 긴장풀라는 매니저들의 격려에 쭈뼛하게 대답하는게 전부. 텐마가 말이 없기에 덩달아 팀원 전체가 고요해졌다. 그것은 저 소년의 존재감이 신도를 대신할 만큼 이 무리 내에 크게 자리잡았다는 의미기도 했고, 아이들 모두가 이 결승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성제. 이시도 슈지. 결국 오늘의 시합은 그를 끌어내리려는 도전이자 일본대륙 내 축구계의 판도를 뒤엎기 위한 단 한번의 기회가 된다. 그런 시합에 임하는 것이니만큼 자연스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 무거움의 기원은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키도."
나는 걱정스러움이 실린 목소리에 반응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나즈마 캐러밴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엔도가 두 눈에 염려를 담은채 그곳에 서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묵묵히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엔도."
"그게....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래도 역시....."
볼을 긁적이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 심상치 않다. 그러나 나는 엔도가 하고싶은 말을 단숨에 알아챘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무엇을 신경쓰고 있는지가 전해져온다. 한 번의 눈짓으로 원하는 말을 전할 수 있을만큼, 우리들이 지나온 세월은 그렇게나 길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팀의 코치로써 엔도를 보필하고 그의 상태를 예리하게 살폈어야 하는 것은 내 역할인데 도리어 걱정이나 끼치고 있는건가. 나는 내가 짐작하고 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고엔지에 관한 것... 말이냐."
"....그래. 성제가 고엔지라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
성제가, 고엔지. 그래. 이제는 믿지 않으면 안될 만큼 너무나 당연해 진 사실.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 사실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던 자신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이후엔 금새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엔도에게까지 걱정을 끼쳤다면 대체 얼만큼이나 스스로의 동요함을 흘려보내고 있었다는 것일까. 나는 쓴 웃음을 지며 가만히 엔도를 응시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는지 엔도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해왔다.
"물론,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고엔지와 직접 맞부딪쳐야 하는건 엔도 바로 너다. 난 괜찮으니까 네 마음을 단단히 잡도록 해."
"......으응. 네가 그렇다면.... 알겠어!"
엔도는 한결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살짝 웃음지었다.
"그래도, 키도 네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
어린 아이같은 미소로 다정함을 건넨 엔도는 먼저 사라진 아이들의 뒤를 따라 승강장으로 달려간다. 나는 그런 엔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열차는 벌써 도착해있었고 앞다투어 열차에 오른 아이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열차에 오른 엔도가 내게 손짓했다. 그 손짓은 어쩐지, '함께있어 다행'이라는 엔도의 목소리를 뒷받침하듯 보였다. 하지만 서로가 옆에 있어 다행인 것은 엔도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인지도 몰랐다. 나는 천천히 승강장에 올라 엔도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리들은 함께 있다. 함께 있으면서 서로의 지지점이 되어준다. 그래서 정말로 다행이야. 하지만....
하지만 고엔지.
너는 어째서 함께 있을 수 없는걸까.
언제라도, 어느 순간에라도, 세 사람은 늘 함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함께'에서 고엔지가 사라졌다. 어떤 작은 징조나 어떤 작은 메세지도 남기지 않은 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는 그저 사라져버렸다. 어째서였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무슨 일이 생긴걸까. 계속해서 염려했다. 걱정하고, 그리워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결과를 맞이했다. 성제. 관리축구의 정점에 있는 자. 그는 돌아왔다. 하지만 단 한번도 상상한 적 없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자리는, 늘 함께였던 우리들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결코 우리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 그 어딘가일 것이다.
"....이시도 슈지?"
그러나 순간 들려온 엔도의 목소리에, 나는 잠겨있던 생각에서 벗어났다. 천천히 들어올리는 시야에 붉은 잔상이 비친다. 열차의 중앙을 가르는 차창 너머로 낯선 실루엣이 보였다. 어릴 적과 다름없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들어온 그는 언제고 만나리라 여기며 그리워해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복장도, 외모도,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단 한 가지 그 빛나는 흑안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고엔지...."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목소리가 닿았는지 잠시 그의 눈동자가 고글 너머 내 눈동자로 옮겨온다. 두 개의 눈동자가 맞부딪쳤다. 뜨겁다. 몸 속에서 거세게 숨을 쉬는 어떤 것이 온 몸을 뜨겁게 달궈온다. 그러나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타들어갈 것처럼 날뛰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시도 슈지는 빠르게 시선을 돌려 내 앞 자리에 앉았고 눈을 감았다. 가벼운 인사나 표정의 동요함조차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 곳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리들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그리고 스타디움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그는 단 한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한국팀 파이어 드래곤과 시합이 있던 날, 세계대회 아시아 예선 결승전에서, 고엔지는 어딘가 상태가 좋지 못했다. 어떤 시합이라도 전력을 다해 집중해왔던 고엔지였기에 그날 그가 보여준 태도는 정말이지 이상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묘하게 평소와 다르다는 것 쯤은 동료들 모두가 알고있었다. 토라마루는 물론이고 코구레나 카베야마까지도 눈치챌 정도였으니 나 또한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엔지에 대해서 엔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몇번이고 고엔지를 향해 던지는 엔도의 시선은 그가 고엔지의 상태에 대해 무언가 알고있음을 반영해주었지만, 엔도는 끝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엔도가 되었든 고엔지 본인이 되었든 언젠가는 말해주리라 믿었기에. 그런 신뢰가 있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합이 시작되고 나서,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날 시합 내내 고엔지가 보여주었던 태도는 단순한 '이상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필드가 혼란으로 가득 차있어, 내가 모르는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 시합날 그라운드 위에 엔도는 나오지 못했다. 두 사람이 없는 필드. 그래도 이 시합에 전력을 다해야해. 고엔지가 하지 못하는 만큼 그 빈 자리를 메꿔야만 해. 시합 초반 계속해서 같은 중얼거림을 되내였다. 필사적으로 달려 공을 쫓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후도 아키오의 등장과 함께 산산히 부숴져버렸다. 후도 아키오의 플레이는 예고도 없이 나를 옭죄어왔고, 결국 나는 고엔지를 신경쓰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시합종료 휘슬. 그리고 종결되어버린 그라운드 위의 흔적들. 결과는 큰 승리였지만 내 마음은 참패였다. 하루나의 성화에 못이겨 시큰 거리는 발목에 한번 더 파스를 뿌린 뒤, 나는 당장 고엔지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벤치에, 동료들의 무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좀 더 넓은 그라운드 한 켠. 내가 본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 깊이 허리숙여 인사하는 고엔지의 모습과, 그를 보며 웃는 엔도의 미소였다. 역시 엔도는 알고 있었나. 고엔지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무엇이 그토록이나 고엔지를 절망으로 몰아넣은 것인지. 틀림없이 엔도는 알고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알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나와 고엔지 사이에 놓인 거대한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한다고 내 머릿속 무언가가 외쳤다. 나는 짧게 호흡한 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뒤에 섰다. 승리를 축하한다는 유카의 애띤 목소리와 후쿠상의 기쁨섞인 격려의 말들이 내 귀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생각할 수 없었다. 고엔지의 등 뒤에 서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서, 그의 이름과 그의 혼란스러워하던 얼굴만이 공허한 허공에 남아 바보처럼 멤돌았다. 고엔지. 쉽게 부르던 이름마저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무언가 먹먹한 것이 꽉 들어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키도?"
결국,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왜 그러지?"
시선을 맞출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건 내가 아닌데. 이렇게나 쉽게 발견하고 이렇게나 쉽게 물을 수 있으면서, 왜 나는. 그리고 왜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키도. 잠깐 나 좀 ㅂ....."
"어째서지."
"뭐?"
나지막히 흘러나온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생각보다 싸늘하게 흘러나와 나조차도 놀라버리고 말았다. 고엔지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한 번 뱉어버린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주워담을 수 없다면, 제대로, 물어보는 수 밖에 없다.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좀 더 크게 소리쳤다.
"어째서냐, 고엔지!"
"어째서냐니.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어째서....! 너는 어째서....!! 대체 어째서냐!!"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키도! 좀 더 차분하게...."
"너는 어째서 아무 말도 해주질 않는거야!"
그래. 나는 그에게서ㅡ.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엔도가 보여주는 눈길을 나는 단 한순간도 고엔지에게 보내줄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짐을 끌어안고 있는지, 그가 헤쳐나가고자하는 가시밭길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혼란 속에서 어떤 결심으로 일어섰는지,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눈을 마주치면 서로의 행동을 읽을 수 있을정도로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고엔지를 지탱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대로, 그 역시 나의 지지점이 되어왔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르다. 분명히 달랐다. 내가 신뢰해왔던 연결점은 그가 생각하는 연결점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고엔지는 고엔지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키도."
"아니. 됐다."
그래서 나는 돌아섰다. 차갑게 식어가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아두지 않았다.
"그래. 고엔지 네 말대로다. 이건 너무.... 나 답지 않은 행동이었지. 사과한다. 내가ㅡ, 지나쳤다."
"키도....!"
"됐다고 했잖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엔지의 목소리 중 그 어디가 나를 그렇게 질척한 감정 속으로 몰아 넣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스스로가 너무도 혼란스럽고 또 마음이 무거워서 그 울분을 참지 못했을 뿐이다. 단지 그 뿐이었는데. 그것이 왜 이토록이나 분하고, 또 분한지.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감정으로 치부할만큼 단순한 것도 아니었고 그대로 가슴 속에 묻을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더 이상 그를 움켜쥘 수가 없었다. 하지만ㅡ,
"....아니. 난 아무 것도 되지 않았어."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니, 납득할 수 없게도. 고엔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비틀리듯 잡혀버린 손목에는 힘이 들어가있지 않아서, 나는 너무도 쉽게 고엔지의 손에 이끌리고 말았다. 그는 내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쥐고서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었다. 무엇에 끌려가고 있는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는 빠르게 움직였고 나는 엇갈리는 발걸음을 놀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어두운 복도. 그라운드를 벗어나 찾아간 경기장 복도에서 그는 있는 힘껏 나를 당겨 벽 앞에 세웠다. 그 검은 눈동자가 뚫어질 듯 뜨겁게 다가왔다. 등 뒤로 벽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엔지를 마주대했다.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도전하듯 달려오는 그의 시선 앞에 발가벗겨진듯한 기분으로 그저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네가 하고싶은 말이 뭔지 알겠어."
"......."
"네가 묻고싶은 것도, 뭔지 알겠다."
"......."
한 마디 한 마디의 목소리에 실린 무게가 무거웠다. 나는 무언가를 잘못한 어린아이처럼 반사적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고엔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비교적 확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대답해주지. 정 원한다면 말해주겠어."
"......."
"내가 왜 너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고엔지...."
"어째서 너에게 입다물고 있었는지가 그렇게 궁금하다는 거냐!!"
왜, 화를 내는걸까. 쏟아지듯 다가오는 그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다. 하천가에서, 제우스 중에게 패한 내게 라이몬으로 오라고 말하던 그 날 이후로 고엔지는 단 한번도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떤 고민과 어떤 태도 앞에서도 그는 나를 이해했고, 그리고 작게 웃었다. 하지만 오늘은 웃어주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어째서일까. 하지만 나는 쏟아지는 그의 울분 앞에서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엔지는.... 그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소리쳤다.
"왜냐하면!! 그건.....!"
* * *
[잠시 후 이 열차는 '하늘의 천황 스타디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모두 빠진 물건이 없으신지 확인하신 후.....]
울려나오는 방송에 눈을 떴다. 물끄러미 정면을 응시해오는 이시드 슈지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스쳐지나간 눈빛에는 익숙한 그리움과 낯선 날카로움이 동시에 담겨져있었다. 그런 나와 이시드 슈지를 번갈아 바라보는 엔도의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괜찮을거라 여겼는지, 엔도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까지의 시합과는 다르게 막연한 설레임보다는 긴장감이 열차 내부를 감돌았다. 이것이 세기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승전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무겁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긴장감을 세이도우잔 선수들만은 느끼지 못하는지 오히려 그들은 편안한 표정을 했다. 염려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한 얼굴이다. 어째서일까. 그런 표정이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역에 멈춰섰다. 바람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엔도가 가장 먼저 내리고, 그 뒤를 따라 매니저들과 아이들이 줄지어 내려섰다. 양측 선수단이 모두 열차에서 내릴때까지도 성제는. 아니, 고엔지는. 단 한번도 우리 쪽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선수단을 바라보며 눈대중으로 인원을 체크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히려 그의 곁에 서있던 토라마루나 사기누마는 엔도가 신경쓰이는지 몇번인가 힐끔거리는 눈길을 보내왔다. 사실은 그것이 좀 더 당연하고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제스쳐를, 고엔지는, 단 한번도 보내주지 않았다.
"키도. 가자."
엔도의 부름에 가까스로 걸음을 옮길 마음이 생긴다. 나는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서로 한 마디 말도 없는 고요한 승차장에 저마다의 시간이 담긴 발소리만이 울려퍼진다. 승차게이트를 빠져나오고 나자 양측 선수단 각자의 대기실로 이어지는 복도가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서로의 영역이다. 바로 여기서부터는, 그들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갈라져 이동하게 된다. 고엔지는 선수들과 토라마루를 먼저 앞으로 보내며 인원을 꼼꼼히 체크한 뒤 맨 마지막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모습을 두 눈에 담으면서도 일말의 움직임조차 보일 수 없었다. 서서히 멀어지는 고엔지의 뒷모습은 그대로 어둠 깊이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을, 뻗으면ㅡ. 닿을 수 있을까. 그는 내 목소리에 귀기울여 줄까. 우리는 어째서 같은 곳에, 함께 있을 수 없는 걸까.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함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키도...? 빨리 안오고 뭐해."
".....엔도."
"응? 왜 그래?"
".....미안하다, 엔도. 난 역시....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되겠어."
"키도?"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되겠어. 묻지 않으면 안되겠다. 반드시, 그를 붙잡고 물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하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마음에 새길 수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시합에 임할 수는 없다. 그럴수는.... 없었다. 그래서, 확인해봐야만 했다. 그러니까 반드시.
"금방 돌아올게. 정말 미안하다, 엔도. 잠깐이면... 아주 잠깐이면 된다."
"에!? 키도! 지금 어디가는...."
엔도의 목소리는 귀에 와닿지 않았다. 나는 고엔지가 사라진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분명한 무언가를 쫓고 있는건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그저, 발걸음이 옮겨지기에, 마음이 움직이기에, 길을 따라 걷고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쉽게 그를 따라잡았다. 내가 빠르게 따라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복도의 한 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 홀로 남아 분명하게 내 두 눈을 마주쳐온다. 나는 내 걸음을 천천히 달래며, 그의 몇 걸음 앞에 멈춰섰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붉은 두개의 동공은 쉴새 없이 떨리고 있으리라.
".....올거라고 생각했다. 키도 유우토."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도 이름을 부른 것은 그가 먼저였다. 그의 입에서 그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내 이름인데 이상하게 낯설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하게 부딪쳐온다. 그러나 기세좋게 그의 뒤를 따라온 것에 비해 나는 오히려 당당하지 못했다. 그의 앞에 석상처럼 굳은채,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혼란 속을 헤짚었다. 그에게서 나의 이름이 튀어나온 뒤에도 나는 망망한 대해(大海)를 헤매듯 같은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는 의아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내게 하고싶은 말이 뭐지?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일텐데."
"......고엔지."
힘겹게 내뱉은 한 마디는 결국 그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부를 곳이 없는 이름. 대답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이름. 아무 말도 없이 지난 2년간 사라져야 했던 그가 버려야만 했던 이름이었다. 그는 살짝 눈쌀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나는, 고엔지가 아니다. 내 이름은 이시드 슈지다."
".......어째....서....지."
나는 이시드 슈지다.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던 머릿속에 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그 말 한마디가 억누르고 억눌러왔던 무언가의 스위치를 건드렸다. 그 목소리는 기폭제가 되어, 절실하게 잠재워왔던 마음 속 무언가를 거세게 터트린다. 스스로가 인지할 수 없는 저 너머 어딘가에 묻어두었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고엔지의 면상 위로 쏟아졌다. 키도 유우토 답지 않은 일. 하지만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소리쳤다.
"어째서 네가 이시드 슈지인거야!"
".....?"
"어째서ㅡ! 어째서 네가.... 성제여야만 하는거냐!!"
".....고작 그걸 물어보려고 나를 뒤쫓아온건가."
"아니야! 너한텐 고작 그거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아니다! 네가.... 고엔지 네가 갑자기 사라진 뒤로... 우리들이 그 뒤로 얼마나.....!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헤매었는지 알기나해!! 고엔지! 넌 대체 어째서.....!"
엔도에게 들킬만큼 마음이 동요했던 이유. 이 결승전에 오기까지 심장 한 켠이 계속해서 무거웠던 이유. 성제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고글 속에 감춰진 눈동자가 흔들려야만 했던 이유. 왜 하필이면 지금. 왜 하필이면 이 장소에서. 그 모든 감정의 수원들이 터져나오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대꾸해오는 고엔지의 서늘함은, 이 모든 의아함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키도 유우토."
그는 나지막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것이 해답이었던 듯 나는 토해내던 울분을 멈춰세웠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한 단어 한 단어가 느리게, 그리고 깊게, 귓가로 흘러들어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어떤 시간을 겪어왔든,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
심장에 무언가가 몰아치듯 쾅하고 부딪친다.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싸늘한 것도 아니고, 어떤 감정을 담은 것도 아닌, 그저 덤덤한 고엔지의 눈빛이 가득히 담긴다. 손 끝이 떨렸다. 식어가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아무 것도, 없나? 너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일까? 하나의 공 앞에서 전력을 심으며 달려왔던 우리들의 시간은 정말 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걸까? 대답해 봐, 고엔지. 물을 수 없는 질문들이 입가를 맴돌다 사라진다.
....하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묻고싶었던 건 그런게 아니었다. 아이들의 장난같은, 편가르기 식의 물음과 해답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아니다. 고엔지가 선택한 길이 어떤 것이든지, 사실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왜 그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유카나 토라마루가, 사기누마가, 혹은 아후로디가 서있을 수 있는 이시드 슈지의 길 위에 어째서 나는, 나 키도 유우토는 서있을 수 없는지. 이전에 엔도에게는 주어지고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그 동일한 눈빛을 어째서 십년이나 지난 지금도 반복해야만 하는건지. 사실 내가 정말로 알고싶었던 해답은, 바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보는 것 밖에 없었다. 그저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서있었다. 그저 가만히 서서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고엔지와 나 사이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마주 선 채 한참이나 두 사람 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떨구어진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 않았기에, 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저 덤덤하고 그저 무신경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표정 앞에서 어떤 말들로 대답해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움에 더더욱, 해야 할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나의 침묵어린 행동 앞에서, 갑자기 고엔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하고싶은 말이 뭔지 알겠다."
"....?"
갑자기 되돌아온 그의 반응에,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짙은 얼굴 위에 겹쳐진 그림자는 너무나 두껍고 진한 것이어서 정확히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조금은 난감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들릴듯 말듯 새어나온 한숨과 함께 그의 두 눈 위에 떠올랐던 미묘한 변화 역시 사라져버린다. 그는 여태까지와 다르지 않은 덤덤하고 무신경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결국 넌 십년 전 그 날과 같은 질문을 하고싶은 거겠지."
십년 전.... 그 날....?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쓰고있는 고글 덕에 나의 표정이 그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대답해주지. 궁금하다면 말해주겠어."
그의 목소리가 뇌에 닿기도 전이었다. 무언가에 당겨지며 갑자기 끌려나간 탓에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며 발을 디뎠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지할 틈도 없이 등 뒤에 서늘한 무언가가 닿는다. 화들짝 놀라 들어올린 시선 앞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고엔지가 있었고,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쉽게 고글을 벗겨냈다. 단단히 붙들린 한 쪽 손목에서 아픔이 느껴지는 찰나, 고엔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벗겨진 고글이 바닥을 뒹굴었다. 양쪽 어깨가 그의 뜨거운 두 손바닥에 붙들려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그가 내 어깨를 붙잡고 있지 않았더라도 나는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낯선 흑안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두려움인지 불안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대답 또한ㅡ,"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닿는다.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파르르하게 떨리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십년 전 그 날과 같다."
기다란 여운이 남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천천히 멀어져간다. 느껴지지 않을만큼 멀찍이 떨어져간다. 숨소리가 사라지고, 어깨를 붙들었던 그의 손이 떨어져나간다. 망설임도 없고 혼란도 없는 덤덤한 발소리가 이어진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게서 돌아선다. 어둠 속에 가라앉은 복도 저편으로 긴 메아리를 울리며 멀어져간다.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소리를 잡아낼 수 없는 곳까지, 멀리ㅡ. 그리고 또 멀리ㅡ. 멀어져간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내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 곁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긴 허공, 작은 숨소리마저 울려퍼지는 공허한 공간. 나는 더 이상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어 그대로 주저앉았다.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지는 소리마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래.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붙들었던 온기만큼은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그가 흘리던 숨결은 틀림없이 이 곳에 있었다. 나는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목소리를 기억했다.
내 대답 또한 십년 전 그날과 같다.
십년 전 그 날. 결국 나는 그에게 무엇을 묻고 싶었던 걸까. 그의 무엇을 믿을 수 없어 그토록이나 애가 탔던 것일까. 사실은 알고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스스로의 욕심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허탈함인지, 아니면 그리움인지. 그 미소의 근원은 나조차도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뭐라....고....?"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엔지의 얼굴을 응시했다. 단단히 화가 나 있어 소리쳐 뱉어내긴 했어도 그의 얼굴 위에 후회함이나 거짓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심인가? 그가 내게 외치는 소리가, 그의 진심인건가...? 손이 떨렸다. 괜시리 주먹을 쥐었다폈다만 반복하며 그의 눈빛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도 않았고,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확고함이 가득 들어차있어 나는 아무런 말도 대꾸하지 못했다.
"믿기지 않는거냐? 그렇다면 한번 더 말해줄까!?"
"......"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내게 소리쳤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야! 말할 수 없었던 거다ㅡ!!"
울컥, 하며 무언가가 솟구쳐올랐다. 나는 그것들을 가까스로 삼켜내고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몇번이나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한 결과 나는 결국 그의 이름을 되내일 수 있었다.
"고....엔지..."
"감독님들께도 말할 수 있었어. 엔도에게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도저히 너에게 만큼은 말할 수가 없었어! 너만큼은....! 어떻게 해도 너에게 만큼은 말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나에게는 말할 수 없었지? 이 질문은 입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전달된 듯 했다. 나의 흔들리는 눈빛 너머에 감춰진 진심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몇 번이나... 오늘이 되기까지 몇 번이나....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말하는 게 키도 너를 위한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결국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패스해오는 네게, 이제 다시는 너와 같은 필드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다시는 함께 달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차마 내 입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런 말을 어떻게 내 입으로 하라는거야!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었던 거야."
고개숙인 고엔지의 목소리는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아, 점차적으로 그에게 실려있던 울분이 사라져갔다. 사죄하듯 읊조리는 그 목소리는 너무나 절실해서 나는 어쩐지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엔지는 마지막으로 그 한 마디를 남겼다. 아주 잠시동안 흐른 침묵을 타고, 그는 결심한 듯 두 눈을 들어 나를 마주보았다. 정말 미안하다 키도. 그의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그의 결심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위로? 사과? 아니면 감사의 말? 그 어느 것 하나 그에게 줄 대답에 맞지 않는 것이라 여겨졌다. 결국 잠시동안 망설이던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너무 늦지 않게 와라. 일상적인듯한 말을 남기며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져가는데, 고엔지가 사라져가는데도, 나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를 붙잡지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단지 홀로 남겨지고 나자, 어쩐지 다리에서 힘이 풀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허탈함인지 그리움인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맞대며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말할 수 없었던 거다. 그가 남겨준 하나의 해답이 메아리가 된 듯 끊임없이 귓가에서 울려퍼졌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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