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도총수님이 대낮에 졸고 앉아있는 연성물(엔키) 글상자/Inazma 112013. 9. 10. 22:58
# 키도총수님이 대낮부터 졸고 앉아있는 연성물
# 키도는 워낙에 빈틈이 없으니까... 가끔 빈틈을 보여주는 키도 너무 좋아요 귀여워...!
# 엔도키도
한낮의 그라운드 위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잔디를 스치는 둥근 공과, 공을 뒤쫓는 발소리. 앞다투어 몸을 부딪치는 아이들의 얼굴은 열정을 품고 있어 아름다웠다. 공이 움직이는데로, 아이들이 달리는데로, 엔도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이런 풍경이 그리웠다. 라이몬을 떠나 성제의 뒤를 쫓는 동안 내내 그리웠던 풍경이다. 앉아있는 벤치 위로 여유로운 바람이 흘러들었다. 그라운드에 떨어지는 작은 아이들의 땀이 사랑스럽다. 달려가는 걸음과, 주먹 쥔 작은 손과, 흙투성이가 되어가는 축구공을 보면 늘 몸이 근질거렸다. 함께 달려들어 정신없이 공을 쫓고 싶다. 오랜만에 마주대하는 풍경은 그립고 또 그리워 엔도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키도 네 말대로야. 역시 신도의 빈 자리가 크긴 하지만, 텐마라면 잘 해 갈거야."
"........"
엔도는 그라운드에 눈을 고정시킨 채, 옆에 앉은 키도에게 중얼거렸다. 텐마는 아직 어리고 아직 미숙하지만 축구에 대한 마음만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렇기에 팀원들의 지지대가 되어갈거라 믿었다. 아직까지 텐마의 미숙함을 채워주는 것은 산고쿠였다. 신도의 부재탓일까. 산고쿠는 무의식 중에 맏형노릇을 해야한다는 것을 느끼는 듯 했다. 어느 때보다 열심인 그의 목소리가 텐마와 모두를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키퍼를 니시조노로 교체하고 나면 디펜더가 좀 더 강화되야 할 필요가 있어. 키도. 네 생각은 어때? 실력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 니시조노는......"
그러나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심각하게 중얼거리던 엔도의 목소리는 거기에서 멈춰버렸다. 툭, 소리와 함께 무거운 무언가가 어깨 위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굳어버린듯 엔도는 움직임을 멈췄다. 숨소리도 내지않았다. 귓가에서 들리는 숨소리는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엔도는 당황한 표정으로 살며시 눈동자를 돌렸다. 자신의 단단한 어깨 위에서 가볍게 숨을 쉬는 것은, 낯선, 아니 낯설지 않은 그 무언가였다.
"키, 키도....?"
방금 세탁기에서 나온 빨래감에 코를 묻을 때처럼, 머릿결 마디마다 묻은 상쾌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온다. 감긴 눈. 쌔근쌔근 들려오는 속삭임. 어깨 위로 전해지는 온기는 아이처럼 따뜻했다. 자연스럽게 늘어진 손 끝에 힘이 풀려있다. 그가 들고있던 고글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에 무척 당황했던 엔도는 그 장면을 보며 서서히 웃음을 되찾았다. 맙소사. 키도답지 않았다. 고글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잠을 자는 키도라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엔도는 다시 푸른 하늘 위로 시선을 돌리며 키도가 기대기 편하도록 어깨에 힘을 풀었다. 틀림없이 부담이었을테지. 자신이 없는 동안 라이몬을 감당해 준 키도가 얼마나 쉬지않고 여기까지 달려왔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서, 라이몬을 최상의 팀으로 이끌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키도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아마 그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려버렸기 때문이겠지. 저도 모르게 곯아떨어진 키도라니.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니만큼 괜히 웃음지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앗, 코치님 위험ㅎㅡ!!"
조금은 즐거운듯한 엔도의 상념이 깨진 것은 다급하게 외쳐오는 텐마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엔도는 날카롭게 달려드는 바람소리 앞에서 반사적으로 반대편 손을 뻗었다. 탕!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잠시간의 정적. 일이 벌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키도의 얼굴 바로 앞에서 축구공의 기세가 멎었다. 엔도의 반응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키도의 안면을 강타했을 위협이었다. 엔도의 손에 맞아 힘을 잃은 축구공은 바닥을 구르며 통, 통 소리를 냈다. 황급히 달려온 텐마의 발자국 곁을 지나 그대로 그라운드로 흘러들어간다. 텐마는 엔도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대로 조절을 못해서 그만....!"
"쉿! 쉿...! 괜찮으니까 일단 조용히 해줄래?"
"예?"
평소답지 않은 감독님의 작은 목소리. 괜찮다며 웃어넘길 것 같았던 엔도의 반응은 어쩐지 절실하기까지 했다. 텐마와, 그 뒤를 쫓아 달려온 동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진땀을 흘리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엔도 감독. 그리고 그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것은 틀림없는.......
"코치님?"
누군가가 헉 소리를 냈다. 엔도가 다시 조용히 하라는 싸인을 보내자 놀란 아마기는 아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두 눈에 들어찬 당황스러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키도 코치님이 엔도 감독님의 어깨에 기대서 자고있다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풍경에 모두의 사고가 정지했다. 텐마는 무례하게도 손가락으로 키도를 가리키며 황당한 표정을 흘려댔다. 엔도는 그저 멋쩍은 듯 웃음지었다. 진짜. 이거 진짜인가. 믿기든 믿기지않든 눈 앞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키도 코치였고, 그는 이 정도의 소란에도 눈을 뜨지 않을만큼 깊이 잠들어있었다. 그가 감독으로 있을 때는 연습 중에 조는 것은 고사하고, 학생들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기대어 잠들어있는 코치란 어쩐지 낯설고 어쩐지 여태까지 알아왔던 코치와는 동떨어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코치님도 주무시는구나. 누군가가 또 다시 중얼거리자 나머지 아이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들 약속이나 한듯 잠든 키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평소에는 인상을 찡그리는 일이 많은데다 고글까지 쓰고 있어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속눈썹도 길고 피부도 하얀 것이 꽤 여성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우리 코치님, 그렇게 인상이 강한 분은 아니었네. 작게 벌어진 입술은 촉촉하게 빛났고 살짝 기울어진 바람에 드러난 목선은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이상하게도 그 부드러운 목선으로 자꾸 시선이 움직였다. 자신의 눈동자가 아닌 것 마냥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렸다.
"에헴!... 그러니까... 에.... 타, 타월이라도 덮어드리는게 좋겠구려!"
침묵을 깨고 간신히 말을 꺼낸 것은 니시키였다. 그는 쭈뼛쭈뼛한 움직임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키도의 한쪽 어깨 위에 살며시 타월을 걸쳤다. 닿으면 깨어날까싶은 느리고 섬세한 동작이었다. 가만히 있기 뻘쭘했던 탓인지, 아니면 때아닌 모성애에 눈을 떴는지, 니시키를 시작으로 라이몬 아이들은 하나둘씩 다가와 저마다의 타월을 덮었다. 키도 코치 위로 하나 둘씩 하얀 타월이 덮어졌고 마지막으로 장난끼 가득한 얼굴의 하마노가 자기 타월에서 손을 뗐을 무렵에는, 이미 키도의 모습은 타월산 아래 묻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저기 타월로 뒤덮혀 얼굴까지 푹 쌓여버렸다. 난감한 표정의 엔도가 얼굴을 덮은 타월을 걷어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키도의 호흡은 상쾌한 공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우린 다시 연습이오!"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키도의 앞에서 싱글거리는 웃음을 짓던 니시키는 손뼉을 딱 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심장이 철렁이며 내려앉았다. 니시키는 경악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놈의 '철썩'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길게 묶어내린 머리카락에 무언가가 닿은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자고있던 누군가의 얼굴같은 걸 때렸다거나..... 얼어붙은 니시키의 동공에, 그 '누군가'의 홍옥빛 눈동자가 담긴다. 졸음 가득한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으음....."
키도 코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 일어났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몰랐다. 단지, 수건의 산을 쌓아도 꿈쩍하지 않던 키도의 눈이 꿈뻑거리며 떠졌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눈꺼풀 아래 감춰져있던 붉은 눈동자가 졸음을 담은 채 몇번인가 깜빡였다. 한번. 두번. 세번. 그리고 그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 아니요 그게.....!"
"여, 연습...!"
"연습하러 가겠습니다ㅡ!!"
"열심히 하겠습니다!!"
키도의 질문이 열쇠가 된 듯, 얼빠져있던 라이몬 아이들이 앞다투어 몰려나갔다. 당황한 표정으로 얼어붙었던 니시키가 선두였고,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들 재빠른 움직임이였다. 키도는 눈을 비비며 부시시한 표정을 했다. 뭔가 피하듯 도망쳐버렸다...? 키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문 모를 일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키도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엔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부터 눈물까지 흘려가며 즐겁다는 듯 웃는 엔도의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엔도. 무슨 일이냐. 왜 웃는거지?"
"하하하! 아무 것도 아니야, 키도! 큭큭. 정말 아무 것도 아니야!"
"......."
뭔가 놀림감이 된 것 같은 기분. 키도는 여지껏 힘없이 떨궈져있던 두 손을 모으며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포기한듯 키도는 그라운드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세상이 뭔가 너무 선명한게.... 뭔가 허전한데. 뭐지? 뭐가 허전한거지? 키도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이 덜깼는지 자신이 뭘 찾는지도 모른 채 뭔가를 열심히 찾아댄다. 엔도는 그런 키도가 재밌는 듯 또 다시 한참을 웃었다. 영 이해할 수 없다는 키도의 눈초리를 받고 나서야 간신히 웃음이 멈춘다. 어딘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눈이 가려지지 않으니 조금 더 키도의 감정이 쉽게 드러나는 듯 싶었다. 엔도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고글을 집어들었다.
"이거. 필요하지?"
"응?"
그게 왜 거기에?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키도의 얼굴 위로, 엔도는 가만히 고글을 씌웠다. 간만에 마주한 키도의 붉은 눈동자가 고글 속에 가려지는 건 꽤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마저 고글을 씌우고나서, 키도의 머리를 두어번 토닥였다. 아이처럼 다독여진 키도의 표정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다. 엔도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다고, 키도."
".....내가 피곤해보였나? 아니. 결승전이 얼마 안남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뭐 그렇기야 하지만.... 이젠 내가 있으니까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충분히 필요한 만큼은 휴식하고 있으니 괜찮다, 엔도. 신경써줘서 고맙군."
키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라운드에 집중한다. 엔도는 그런 키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미소지었다. 그래. 함께 있어 다행이다. 네가 있어주어 다행이야. 키도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묵묵히 옆에 있으면서 자신을 받쳐주었다. 애쓰고 또 노력해서 한 시합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었다. 그것이 어린 키도가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다는 것을 그 때는 왜 몰랐을까. 힘껏 달리면 나와 마찬가지로 지칠 수 있고, 때로는 기댈 곳이 필요하기도 한 어린 아이라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 때는 키도의 등이 너무나 커서, 언제나 불평같은 건 한번도 하지 않고 묵묵히 모두를 받쳐주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엔도는 다시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다시는 너 혼자 모든 짐을 지고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다시는 혼자 외롭게 두지 않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테니까. 키도는 바로 곁에 있었고 그리고 자신은 더 이상 그 때의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히 외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너와 내가 함께 일으킨 이 혁명의 바람, 끝까지 지지않고 가져가 우리들의 소중했던 것을 함께 되찾아오자. 잃어버린 우리들의 축구를, 되찾아오자. 엔도는 푸르디 푸른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몇번이고 그렇게 다짐했다.
ㅡ 반드시 그렇게 하자, 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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