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타카오의 럭키아이템은 키스!? 오하아사 열혈 청취자 미도리마가 전갈자리의 럭키아이템을 듣고 본격 멘붕하던 날! 타카오에게 가장 행운 넘치는 하루를 만들어주기 위해 자신의 입술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미도리마가 타카오를 쫓아다니며 키스를 시도하는 가벼운 개그북입니다. (※ 주의 : 마법소녀물이 아닙니다.)
[샘플]
그 날의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외출 준비를 마친 미도리마는 언제나처럼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붕대로 감는 중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작업이지만 그에게는 어느 순간보다 경건하고 진중한 시간이었다. 손톱을 보호해야한다는 사명감과는 별개로 오늘 하루의 운명이 순탄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시작과도 같았다.
붕대의 감김이 흡족하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해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하아사의 순위가 좋지 못했고 하루 일과도 엉망이 되었다. 반면에 순조롭고 만족스럽게 붕대를 감은 날에는 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운명의 선택을 받았다. 붕대가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행운이 따르는 날에 붕대가 잘 감기는 것이겠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닌 열심이었다. 자신의 할 일을 다 한 후에야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그의 인생관에서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존재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라디오에서는 한창 오하아사 방송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별자리별 순위와 오늘의 럭키아이템이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식탁 끝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볼륨이 높았다. 시험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여동생의 항의에 따라 이어폰을 착용한 것이기는 했지만 가족들 모두 이 방송을 시청해야한다는 미도리마의 의견을 굽히지는 못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4위는 게자리네요! 럭키 아이템은 마법의 지팡이입니다! 오늘 하루 당신에게 마법 같은 일이 펼쳐지길!]
4위 정도면 무난한 출발이었다. 럭키 아이템의 구입 난이도 역시 하(下) 수준. 바로 떠오른 물건도 있으니 등굣길에 구입만 할 수 있으면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미도리마는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아직 전갈자리에 대한 정보가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요즘 들어 전갈자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교실에 도착해 제일 먼저 만나는 대상인 타카오 카즈나리에게 그의 별자리에 관한 순위와 필요한 럭키 아이템을 찾아주는 것이야말로 미도리마가 근래 들어 발견한 새로운 취미생활이었다.
[1위와 꼴찌는 동시에 발표합니다! 1위는 전갈자리입니다, 축하드려요!]
매일 같이 럭키 아이템을 찾으러 끌려 다녀야 하는 타카오의 입장에서는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연인이라면 응당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자―아니, 남자여야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행운은 당신의 편입니다! 줄곧 바라던 것을 얻을 수 있으니…….]
연인이라는 명칭을 딱히 내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단어가 아니고서는 자신과 타카오의 관계를 정의하기는 어려워보였다. 시작은 언제였더라. 그러니까 약 두 달쯤 전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전갈자리 럭키아이템은…….]
한동안 혼란스럽던 마음을 다잡아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얼어버린 듯 당황하던 타카오가 그 수줍은 입술을 열어 대답하길…….
[키스―,]
미도리마는 착용하고 있던 이어폰을 뽑아 던져버렸다. 아직도 큰 소리로 무언가 떠들어대는 이어폰을 엠피쓰리에서 분리시키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얼굴색이 파랗게 떠올랐다가 이윽고 새하얗게 변했다. 몇 번이고 곱씹어보았지만 그가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오늘의 1위는 전갈자리. 럭키아이템은 키, 키스.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인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생애에 이토록 당혹스러운 일이 또 있었을까!
그러나 미도리마는 재빠르게 자신을 다잡고 생각을 정리했다. 럭키아이템은 럭키아이템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타카오 카즈나리에게는 여자 친구가 없다. 세상에 단 한 명뿐인 타카오의 연인은 바로 미도리마 자신이었다. 또한 타카오가 무사히 럭키아이템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 역시 자신이 해야만 하는 역할이었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타카오 카즈나리의 행운 넘치는 하루를 위해 자신의 입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등학교 2학년생 키요시가 과거로 돌아가 8살의 휴가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키요시가 무릎 재활치료를 위해 묵고있는 704호 병실에는 신비한 문이 있어서, 밤 12시가 되던 어느 날 키요시가 어린 휴가가 있는 과거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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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린 고등학교 농구부 2학년, 키요시 텟페이가 8개월 째 입원해 있는 이 병원에는 환자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상한 소문이 하나 있었다. 매주 일요일 밤 12시가 되면 귀신이 나타나 돌아다닌다는 병동전설, 혹은 괴담 같은 것이었다. 귀신의 모습이 80대의 노인이라는 둥 10살짜리 꼬마라는 둥 술주정뱅이 아저씨라는 둥 한 많은 여고생이라는 둥 목격자들의 증언이 각기각색으로 이어졌었지만, 얼핏 중구남방처럼 보이는 이야기들 사이에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7층 왼쪽에서부터 네 번째 병실. 침대가 두 개뿐인 이 2인실이 바로 그들의 접점이었다. 귀신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이 병실에 묵었던 사람들이었다. 소문이 널리 퍼질수록 환자들의 기피도 심해져 근래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병실이 되었지만, 입원환자들이 많아지는 시기에는 남는 병실이 없어 반드시 누군가가 사용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딱 한 달이에요. 3층의 확장공사가 마무리 될 때 까지만요. 키요시 씨는 재활이 주 치료이기 때문에 다른 환자들처럼 병실 이동에 큰 부담도 없으시니 죄송하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병원 측에서 공사시간동안 특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드렸으니 생활하시는 데는 오히려 편하실 거예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조잘조잘 설명하기 좋아하던 간호사가 이윽고 걸음을 멈췄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 끌며 따라온 키요시가 시선을 내렸다.
704호. 키요시 텟페이.
간호사가 문패에 팻말을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중략)
불도 켜지 않은 병실에 누워 꿈뻑꿈뻑 눈만 감았다 뜨려니 어둠에 휩싸인 저 천장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다. 다시 잠을 청하려 해보았지만 재활에 지쳐 낮잠을 너무 오래 잔 탓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부터 바스락 거리던 소리도 점점 잦아져 잠을 방해해 왔다.
“…응?”
바스락 거리는 소리?
키요시는 의아함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12시는 당직인 간호사들과 응급실에 상주하는 의사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이 층은 전부 특실로 구성되어 있어 화장실조차 병실 안에 있었기에 누군가가 복도로 나오는 일도 드물었다.
그럼 대체 뭐지? 혹시 생쥐? 키요시의 얼굴이 일순 새파래졌지만 도리질을 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이미 오래 전, 어느 곳보다 깨끗해야 할 병원 안에 쥐가 돌아다닐 리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다면…, 혹시 사람들이 말하던 704호의 귀신…?
키요시는 이불을 끌어 뒤집어쓰고 조심스레 문가로 다가갔다. 바스락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니 문 바깥에 무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해보였다. 환청인지 아니면 귀신이 부린 요술에 걸린 탓인지 이제는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마저 들려오는 듯했다. 이 병실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사람은 많지만 죽었다는 사람은 없으니 악령은 아닐 테고,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허탄한 생각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그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키요시는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하는 소리와 함께 목울대가 움직였다. 문 가까이에 손을 가져갔다. 문을 열면 그 어떤 두려운 존재가 자신을 기다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호기심을 막을 방도 또한 없었다. 키요시가 손잡이 홈을 잡고 천천히 힘을 주자, 그를 가두어두던 병실문이 조금 열렸다. 빛이 새어 들어왔다. 덮어쓰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렸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므로 복도는 어두워야했다. 그러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새하얀 빛이 쏟아지고 있다. 인위적인 전등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틈사이로 비집고 온 바람에 풀냄새마저 실려 있다.
키요시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어 젖혔다. 조금씩 밀고 들어오던 빛이 그를 향해 단번에 쏟아진다. 캄캄하던 병실이 온통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온 몸을 덮칠 듯 파고드는 빛살에 눈이 부시다. 그는 손을 들어 빛을 가리면서도 눈앞에 벌어진 일을 확인하기 위해 애썼다.
갑작스레 덮쳐온 빛에 적응하지 못해 쩔쩔매던 키요시는 하얀 빛이 전부 사그라진 후에야 눈앞에 벌어진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이 정지한 듯,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고 당황한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키요시가 눈을 비볐다. 볼을 꼬집었다. 그러나 눈앞에 드러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문이 열린 곳에는 불 꺼진 복도도, 노래하는 아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은 완전한 다른 세계. 형광등 불빛이 아닌 온기가 서린 햇살이 있는 곳. 키요시가 천천히 그 빛의 세계 안으로 발을 디뎠다.
키요시가 막 재활훈련을 마치고 세이린으로 돌아왔을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1년의 공백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키요시의 실력이 카가미와 붙어서도 뒤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휴가가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키요시를 빛, 자신을 그림자라고 생각해서 점점 가라앉아가는 휴가의 바보같은 생각을 키요시가 사랑으로(?) 교정해주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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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핫! 카가미! 넌 정말 많이도 먹는구나!”
키요시가 껄껄 웃으며 카가미의 등을 두들겨대자 입으로 들어가던 치즈버거가 튀어나올 지경인지 카가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쿠로코가 작게 한숨을 쉬며 키요시의 말에 의견을 덧붙였다.
“자라나는 청소년치곤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쿠로코 너도 이런 식으로 식습관을 바꿔보는 건 어때? 혹시 알아? 그러면 카가미처럼 근육이 붙을지도!”
“…싫습니다.”
단칼에 잘라내는 쿠로코가 뭐 그리 웃겼는지 키요시는 또 한 번의 웃음을 터트렸다. 넉살 좋게도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두 후배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친한 척 굴고 있다. 그래봤자 만난 지 겨우 삼사일. 다시 돌아온 키요시가 농구부에 적응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는데 괜한 우려인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마치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스스로가 1년간의 공백을 매워보려 어떻게든 애를 쓰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사교성 좋은 바보천치에 불과한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 1년 전의 키요시 텟페이는 어떠했더라….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함께 한 추억은 얼마 되지 않는다. 숫자로 헤아려봐야 반 개월 정도. 그것도 초반에는 농구부를 만든다느니 하지 않겠다느니 실랑이를 하느라 아깝게 흘려보낸 시간이 대부분이다. 제대로 된 팀이 갖춰져 실제로 연습을 하고 시합을 뛰고 서로의 패스를 주고받은 것은 굉장히 짧은 나날들이었다. 어쩌면 쿠로코나 카가미가 키요시 텟페이를 알아가야 하는 부분과, 내가 키요시 텟페이를 알아가야 하는 부분은 상당히 겹쳐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난 아직 이 녀석에 대해 잘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고.
(중략)
나는 눈을 들었다. 앞에 앉은 키요시의 얼굴이 환하다.
“하하! 작년엔 그랬단 말이에요?”
“선배들도 바보 같은 때가 있군요.”
“그렇지? 그래서 코가네이랑 이즈키가…….”
왁자지껄하게 울려 퍼지는 속에 그의 목소리가 있다.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키요시의 언어는 조금의 모남도 없이 둥글게 녹아져 있었다. 아아. 그래. 녀석은 빛이다. 원래부터 녀석의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높은 곳에 있어서 다가갈 수 없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부어지는 녀석의 온기는 진짜다. 빛과 그림자라. 그렇다면 빛의 역할은 키요시의 것이다. 그것이 화가 났던 것이다. '나의 빛'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 키요시 텟페이의 존재가 너무나 밝아서, 너무나 높아서, 너무나 멀어서 닿을 수 없다는 것이 미치도록 짜증이 났다.
기다려줄 테니 따라오라고 호언장담하듯 말하긴 했지만 결국 등을 보고 있었던 것은 내 쪽이다. 발버둥 치듯 따라가는 것은 키요시가 아니라 내 쪽. 그런 발버둥을 잡아 이끄는 것은 내가 아니라 키요시 쪽인 것이다. 애초 농구부가 시작 할 때부터 그래왔다. 키요시 텟페이. 이 녀석은 나의 은인. 내게 농구를 되찾아 주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한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키요시 텟페이의 등을 보며 녀석의 농구를 따라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 시절 농구를 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때에 내가 보던 빛이 수많은 강호들이었다면, 지금 내가 보는 빛은 키요시 텟페이라는 것. 결국 그 차이 뿐. 난 언제나 무언가의 등을 보지 않으면 달릴 수 없었고, 결국엔 그 등을 넘어설 수도 없었다.
깊게 가라앉아가는 분노, 그 끝에 빛을 향한 열망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나는 같은 선택을 했다. 키요시 텟페이. 나는 이 녀석이 싫다. 그리고ㅡ,
10월 진격의 거인 통합 배포전 조사덕단에서 나오는 신간 2권 예약 및 수량조사 중입니다.
부스명 니덕분애 / 부스위치 택5 입니다.
10월 코믹에도 가져갑니다. 코믹때 구입하실 분들도 함께 참여해주세요.
1. Dies Irae
* Dies Irae / 표지·글 Tat / 소설 중철 카피본 / B6 32p / 3500 / 아르민 중심 올캐릭터
원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엘런이 아르민을 구하지 못해 아르민이 거인에게 잡혀먹었고, 거인화 역시 아르민이 하게 되었다는 설정의 이야기입니다. 만화책 기준으로 1권 끝에서부터 8권 중반까지의 스토리가 엘런이 아닌 아르민을 통해서 진행되며 아르민을 중심으로 엘런, 미카사, 리바이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커플링 성향은 없고 다른 캐릭터들도 조금씩은 등장합니다.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가져왔기에 분위기가 결코 밝지 않습니다. 취향이 아니신 분은 주의해주세요.
찬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들어와 양시백은 옷깃을 여몄다.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은 가을 문턱이건만 서늘함에 몸이 잔뜩 움츠러든다. 뜨거운 햇살로 가득하던 공기는 눈치 채지 못할 사이에 다가온 가을에 주눅이 들었다. 벌써 추위가 되돌아온다. 저마다의 가슴에 새긴 그 날의 사건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았건만, 시간은 멈추지 않고 제 길을 걸어 다시 1년을 채워간다.
양시백은 탁하게 웃으며 어두운 골목길을 응시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 지도 벌써 1년이 되어간다. 회색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파묻혀 시간을 흘려보내다보니 벌써 여기까지 왔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는 행적을 추적하기 어려웠다. 이제는 그 날 자신에게 들려주던 부탁의 목소리도, 그 목소리만 남기고 떠난 유상일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건만, 그가 남긴 부탁만이 시간 속에 남아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왔다.
그 동안은 멀찍이서 바라만 보던 집 안에 발길을 들였다. 어머니가 죽고 하태성이 그렇게 사라진 뒤로, 이 집을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비어버린 집을 정돈하기 위해 자신과 권혜연 순경이 들렀던 작년 겨울의 방문이 전부였다. 이후로 아무도 찾지 않은 채 양시백의 눈길만을 받아온 집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수북한 먼지뿐이다. 집이야 하태성의 명의로 되어있어 아직까지 건재하다고 하지만 전기나 수도는 끊긴지 오래였다. 양시백은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단칸방의 장지문을 열었다. 천장에 매달린 거미줄을 걷고 썩어가는 작은 식탁을 가져와 펴고 그 위에는 케이크상자를 올렸다.
“무슨…맛을 좋아할지 몰라서 가장 무난한 것으로 해봤어.”
생크림으로 범벅이 된 빵 위에 작은 초 하나를 꼽는다. 하얗게 미끄러져 가는 것이 그 녀석의 머릿결을 닮았다. 성냥의 마찰면이 거칠게 문질러지며 불꽃을 틔우자 그것을 조심스럽게 심지 끝에 올렸다. 어둡던 방안에 촛불이 밝혀져 빛으로 일렁인다. 녀석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살았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이 도시 어딘가에 홀로 숨어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무게를 짊어지고 그 길을 걷고 있는지도.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자신의 삶을 축복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에.
“생일…축하해.”
양시백은 쓸쓸히 웃으며 그를 축복했다.
그 언젠가의 날에는 그의 분명한 호흡을 맞대고 설 수 있기를. 텅 빈 방안에 홀로 타오르는 이 촛불이 그가 선택한 길 앞에 빛이 되어 주기를 바라며, 그는 어둠으로 가득 찬 집 안에 한줄기 불꽃을 가득히 피웠다.
* * *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붙잡아 일으켰다. 아직 여기에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다.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시야를 몇 번이고 다그쳐세웠다. 오랜 시간 도망친 덕에 숨은 목까지 차오르고 폐는 터질 것처럼 아프다. 하태성은 다친 팔을 부여잡고 발을 절룩이며 힘겹게 몸을 끌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떠올라 되도록 이 장소에는 오지 않으려 했건만 오늘처럼 급박한 상황은 처음인지라 저도 모르게 익숙한 길을 선택해버렸다. 자신이 어떤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하태성은 어머니와 줄곧 함께 살았던 집의 문을 열고 뛰쳐들었다. 임기응변이었으나 집 안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나 아무도 없어야 할 공간에, 어둠만이 자신을 반겼어야 할 공간에서 느껴지는 불빛에 하태성은 몸을 떨었다. 누군가 있나? 아니, 사람의 기척은 아니었다. 하태성은 천천히 장지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일렁임에 시선을 빼앗겨 숨을 멈췄다.
‘생일…축하해.’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홀로 타들어가는 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심지가 녹아내려 촛농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케이크 위에 짧디 짧은 초 하나가 꽂혀있었다. 돌아갈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태어난 날 같은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생일도. 세상에는 이런 축복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하태성은 힘이 풀린 다리로 문지방에 주저앉았다. 방금까지 앉아있던 누군가의 체온으로 데워져 따뜻하다. 긴 침묵이 흐른다. 소리 없이 타들어가는 초가 점점 더 짧아졌다. 가만히 입김을 불었다. 작은 공간을 환히 밝히던 빛이 사그라진다. 그러나 어둠에 잠긴 어머니의 방 안에서는 여전히 같은 온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쓰러지듯 바닥에 누웠다.
# 개인적으로 문체나 캐릭터해석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나름의 첫 목일책이었기에 애정을 가지고....있...나?
휴가가 키요시울리는 책
vol 1. 휴가
“지금 그 말, 진심이야?”
낮게 가라앉아가는 목소리와 함께 키요시의 걸음이 멈췄다. 무게가 실린 침묵이 진중한 바람이 되어 귓가로 잦아든다. 휴가는 눈을 감았다. 아아 그래. 뱉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한 번 과거가 되어버린 언어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따라 허공으로 흩어진지 오래였다. 휴가는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돌려 키요시를 마주했다.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텁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 진심이야. 그래서 뭐.”
“…….”
키요시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저물어가는 햇살을 받아 일순 반짝였던 동공마저 탁하게 가라앉는다. 휴가는 그 세밀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일자로 굳게 닫혀 열릴 틈을 주지 않는 입술부터 눈썹 사이를 선명하게 자리잡은 미간주름까지 매일 보는 감정의 흐름을 놓칠 리가 없다. 격하게 흩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득하게 뭉쳐지는 것도 아닌 미적지근한 표정을 장시간 받아내는 것은 역시나 버거웠다. 여기에서 해결을 보지 않으면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휴가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걸음을 재개하며 키요시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평소처럼 곤란하다는 듯 투덜대면서도 따라올 거라고, 아니 따라와 주었으면 했지만, 다섯걸음 쯤 발을 옮길 때 까지도 그의 기척은 없었다.
“…휴가.”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사라질 듯 희미해서 휴가는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멈춰 서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마주하게 될 녀석의 표정을 가늠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여름 한 낮의 덥기만 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냉기가 서려 지독히도 차가웠다. 하지만 어떻게 될 걸 알았다 해도 자신은 잡을 수 없었을 거라고, 휴가는 생각했다.
“오늘은 먼저 갈게.”
돌아서는 발길이 느껴졌다. 함께 걷던 발자국이 멀어져간다. 휴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나오시겠다고? ‘키요시 답지 않은 행동’에서 오는 이질감이 불쾌해 진저리가 올랐다. 이젠 몰라. 어디 하고싶은대로 해보라지, 키요시 주제에. 휴가는 어떤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멈췄던 걸음을 재개했다.
vol 2. 키요시
- 상관없잖아. 하루쯤 연습에 안 나와도.
정말로 별 것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울리던 목소리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칠판을 어지럽히며 나부껴대는 숫자들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의미 모를 수식들을 웅얼거리며 나열하는 교사의 목소리도 인지되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줄곧 자신을 괴롭혀 온 그 녀석의 한 마디 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인 것만 같았다. ‘상관없잖아.’ 내쳐지듯 던져진 휴가의 언어가 머릿속에서 재생될 때마다 가슴이 한웅큼씩 무너지는듯한 착각이 일었다.
휴가가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보다 팀을 먼저 위하는 주장이라는 것쯤은 누군가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이야 말로 휴가의 그런 점들을 높이 평가한 사람이기에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주장의 자리에 추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휴가가 아무 이유도 없이 연습에 빠질 리가 없다. 연락도 없이 체육관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틀림없이 알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믿었다.
집에 가는 거야, 휴가? 연락은 왜 안 받았어. 어디 아픈 건 아니고? 걱정스럽게 던진 질문들은 덤덤하게 돌아온 한 마디에 일축되어 버리고 말았다. 휴가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피어올랐던 웃음은 햇빛을 받지 못한 잎사귀마냥 금세 시들어버린다. 정말 아무 일 없다고? 진지하게 묻는 질문에 눈 한 번 마주쳐주지 않고 같은 대답만을 반복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침착해서 두 사람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작용들마저도 가라앉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오늘 연습에 왜 안 나왔어? 딱히 해명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믿고 있었으니까.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지지 않은 불친절한 대답이라도 사정이 있었다거나 한번 만 이해해달라고 해주었다면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족했을 것이다.
- 상관없잖아. 하루쯤 연습에 안 나와도.
또다. 또 같은 목소리가 뇌리를 때렸다. 뒷목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전기가 오르듯 쥐가 났다. 키요시는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로 손을 가져갔다. 사실 그는 뱃속 저 편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오는 이 찝찝한 감정들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휴가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면상에 대놓고 네가 싫다, 와 같은 소리를 하는 휴가였지만 그런 배려심 없는 언사에 발길이 돌아섰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주장이라는 책임을 져버린 것에 대한 실망감? 아니. 실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만 그것도 백퍼센트 정답은 아니었다. 자신이 없는 긴 공백의 시간 동안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 위치를 감당해준 것이 휴가라는 사실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하고 있다. 그런 자신이 실망이니 뭐니 하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오히려 사치에 가깝다고 생각하니까. 휴가가 끊임없이 쌓아 올려온 계단을 그런 식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오히려 용서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자신일 터였다.
하지만……. 그러면 어째서?
복잡한 수원들이 구질구질하게 얽혀 있어, 어디가 이 실타래의 출발점인지 찾아내기는 어려워보였다. 그냥 한 순간의 욱하는 감정이었을까. 그런 식으로 먼저 돌아간 것에 대해서, 사과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한번 뇌리가 울렸다. 심장이 아프게 죄여온다. 풀어지던 눈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는 났다.
그리고 당분간은 휴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vol 3. 휴가
페인트 존까지 치고 들어간 키요시를 미토베와 카가미가 막아섰다. 쉽사리 슛을 할 수 없어 진격하던 걸음을 멈춘다. 커다란 두 녀석이 달려들어 수비하는 덕택에 골대까지 이어지는 길이 막혀버렸다. 그는 우왕좌왕하지 않고 침착하게 길을 살폈다. 마침 두 사람의 수비만으로는 키요시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유인지 3점 슛 라인 바깥의 휴가에게 붙어있던 마크가 떨어져나왔다.
“패스해!”
휴가가 키요시를 향해 소리쳤다. 아주 짧은 순간,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그러나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키요시는 공을 쥔 채로 강행돌파를 선택했다. 가볍게 페이크를 섞어 미토베를 떼어내고, 카가미와 동시에 뛰어오른 순간 늦게 내는 권리를 사용해 바로 옆으로 달려온 후리하타에게 패스했다. 후리하타가 짧게 무릎을 굽혔다가 쏘아올린 슛이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잘했다. 후배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며 키요시는 흡족한 듯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스치는 휴가의 어이없는 표정 같은건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연습 중지! 잠시 쉬겠다.”
아직 시합이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휴식이 선언됐다. 키요시, 너 나좀 잠깐 봐. 키요시가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보는데 휴가가 그의 곁을 지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연습복으로 이마의 땀을 닦던 키요시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래도 그는 생각보다 얌전하게 뒤를 따라나왔다.
“오늘 대체 뭐야? 왜 그런 식으로 플레이 하는 거냐!”
누가 들을 새라 학교 뒤뜰까지 끌고 나와선 다짜고짜 면상에 대고 냅다 소리친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예민해져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키요시 또한 평소의 헤실거리는 웃음이나 여유섞인 엉뚱함으로 반응하지 않는 다는 점이 못마땅했다. 그저 굳어진 시선만이 휴가의 성난 동공 위로 가볍게 내려앉는다.
“시합 중엔 개인적인 감정을 싣지 마! 방금 전엔 왜 패스하지 않았지?”
“……골은 넣었잖아. 뚫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패스로 돌렸으면 3점이었어!”
“점수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런 수비를 뚫어보는 것도 필요한 연습이고, 1학년에게 슛을 해볼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해.”
“키요시!”
휴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났다. 진심이 아니잖아? 아무리 좋은 구실을 붙여다가 변명한다 해도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오고갔던 시선 속에서 느껴졌던 질척한 감정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실 키요시가 왜 그런 플레이를 했는지 짐작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가벼운 핀잔으로 끝났어야 할 대화가 점점 격해졌다. 녀석이 어떤 서운함과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건지 이해할 수 없는건 아니었지만 그런 감정들을 코트 위로 가지고 올라왔다는 게 참을 수 없었다. 평소의 키요시라면 아무리 서운한 점이 있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시합을 끌어갈 녀석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코트 전체를 보고 가장 필요한 곳으로 공을 돌려줄 터였다. 분명 그랬는데.
“너에겐 연습이 그렇게 쉽냐?”
모두가 전력을 다해 열심을 쏟아 붓는 이 코트가, 함께 정상으로 올라가자고 다짐했던 약속들이, 그깟 사소한 감정에 묻혀버릴 정도의 것 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 녀석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키요시에게서 되돌아온 대답은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쉽다.”
“뭐라고?”
“쉽다고. 너무 쉬워서, 아주 아주 쉬워서! 네가 아무렇지 않게 빠져버려도 상관없는 한 번의 연습에 난 내 고장 난 무릎을 걸었어! 됐어!?”
당장 멱살이라도 잡아 올릴 것 같던 휴가의 동작이 멈춰버린 이유는 달리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래. 굳이 집어보자면 키요시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입안에서 맴도는 언어들을 닫아버리며 휴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그시 눌러 담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이 앞에 있다가는 꼭지가 돌아버려서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앞에 선 저 바보를 지탱한 무릎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몇 번이고 지탱해주었다. 몇 번이고 구원해주었다. 세이린을. 이 오합지졸 농구부를. 그리고 나를. 완전히 나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남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엉켜 어떻게든 소중히 하고 싶었다.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상하지 않도록 애써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고장났다니? 고장 난 무릎이라니? 함께 정상에 오르자던 약속은 이미 녀석의 마음 한 켠에선 포기되어진 게 아닐까. 그런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간 순간, 이미 휴가의 심장에 질러진 도화선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불길이 되어 있었다.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봐.”
휴가는 돌아섰다.
“하고싶은대로 해버리라고!”
체육관으로 돌아와 쾅 소리 나게 문이 닫힐 때까지,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vol 4. 키요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멀어져가는 휴가의 등을 보면서도 붙잡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등을 두드리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정말 원하는 만큼, 정말 원하지 않았다. 이해해주길 바랐다. 설명해주길 바랐다. 네가 착각한 것이라고 다그쳐주길 바랐다. 붙잡아 주길 바랐다.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닌데. 이런 식으로 상처를 주고 싶었던 게 아닌데. 쓰게 웃었다. 심장이 죄여올 듯 아팠다. 휴가. 이름이 낮게 새어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휴가. 좀 더 크게 불러보지만 마찬가지였다. 소중한 사람인데. 정말로 소중하게 아껴주고 싶은 사람인데.
그러나 휴가에게는 좀 다른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바라보는 시선과 서로를 느끼는 감정이 반드시 상호간에 동일한 무게를 지닌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나자 심장이 무거웠다. 쿵쾅대는 움직임들이 그대로 전해와 타들어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휴가의 두 손이 옭아매고 들어와 쥐어 짜는듯한 감각이었다.
나는 네가 정말 싫다, 키요시. 아무리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으르렁대듯 달려들어 삿대질을 한다해도, 그것이 진심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단지 휴가는 진심을 표현하는 데에 서투른 사람이어서 직구를 던지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가 내던졌던 말의 의미 그대로만은 아닐 거라고. 참 소중하기에 아껴주고 싶었던 이 마음은 동일할거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쉽게 간과해 버린 채. 바보같이. 정말, 바보 같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간신히 질문은 떠올랐지만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회한과 서운함이 한데 어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쉽게 성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런 감정을 대처하는 데는 서툴렀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어도,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키요시는 발길을 돌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연습을 버려둔 채 체육관에서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아아. 정말 최악이야.
vol 5. 휴가
키요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속절없는 시간만 흘렀다. 이런 식으로 싸우고 이런 식으로 헤어진 것이 처음이라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다가 집어삼킬 듯 떠오른 햇살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섰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하지. 쉬는 시간에 녀석의 교실이라도 찾아가봐야 하나.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메웠다. 간신히 생각의 꼬리를 돌려 해야 할 일을 체크한다거나 오늘 할 연습에 대해 짠다거나 해보기도 했지만 어떤 생각을 하든 맨 마지막에는 키요시에게로 이어졌다. 녀석이 없었던 1년의 공백이 무색하리만큼 이제 와서 키요시가 없는 포지션을, 키요시가 없는 연습을 상상하기란 힘들었다.
철심 주제에 그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코가 뒤에서 밀고 휴가가 앞에서 당기도록 이 농구부를 만든 것은 그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좀 더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가지고 정 가운데에서 세이린을 받쳐야 할 것 아닌가. 누구보다 단단해야 할 기둥이 이런 식으로 발을 빼버린 것에는 여지없이 화가 솟구쳤다. 그러다가도 결국,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러니저러니 몰아붙이고 괜한 화풀이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키요시 텟페이가 화를 낸다는 것은 어찌됐건 간에 희귀한 경험인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아니, 희귀한 경험이라기보다는 거의 처음인 듯 했다. 애초 이성과는 동떨어져 있는 녀석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휘말려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런 식의 싸움은 정말이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화를 내는 쪽은 자기 자신, 그리고 그걸 받아 넘기며 웃는 쪽이 녀석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다시 생각하니 또 열이 오른다. 그깟 연습 한 번 빠진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아니, 대수기는 하지. 대수기는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건 다…….
“휴가…?”
낯익은 목소리를 먼저 인지한 것이 몸이었는지 머리였는지 확인할 도리 없이 걸음이 멈췄다. 내리깐 시선이 닿은 곳에 커다란 발이 서있다. 아아.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휴가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들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키요시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왠지 이 녀석의 얼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어제도 그제도 매일같이 본 얼굴인데도 어쩐지 지나치게 오래 된 것 같은. 아니, 잠깐.
“키요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라고 다그칠 새도, 말릴 새도 없이 터져버린 얼룩에 모든 시간이 정지해버린다. 툭, 하고 떨어지는 아련한 느낌은 녀석의 웃음 속에만 들어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눈가에서 넘쳐흐른 줄기가 볼을 타고 턱 끝까지 흘러내려와 툭, 하고 땅으로 떨궈졌다.
“어어….?”
스스로도 당황했는지 눈가로 손을 가져가더니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어쩔 줄을 모른다. 줄줄히 젖어드는 눈동자가 물기를 가득 담아 어른거렸다. 그 맑은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아, 그래. 아무 것도 상관없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휴가는 키요시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vol 6. 키요시
한참을 달리다가 멈춘 곳이 어디였는지, 앞서 달리던 휴가의 등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휴가의 손이 닿은 손목이 무척 뜨거웠다는 것과, 뿌옇게 흐려진 채 돌아오지 않는 시야 너머에서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표정이 사랑스러웠다는 것 밖에는. 터져버린 눈물과 함께 자신 안에 있던 무엇이 터져 나온 것인지 키요시는 알지 못했다. 그저 한 방울씩 떨어져 흐를 때마다 쌓이고 맺혔던 것들이 하나씩 풀어진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
휴가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에 한다는 말이 의외였다. 연습을 빠진 것도 미안하고 심한 소리를 한 것도 미안하고 하는 식으로 더듬더듬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가 단 번에 인지 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런 식으로 화를 내고 사라져버린 휴가가, 스스로 끊어버린 끈을 들고 와 자신의 손에 쥐어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또한 너무나도 슬펐다.
“나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어, 휴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물기 섞인 말을 간신히 꺼냈을 때 휴가는 그저 그것을 덤덤히 받아들여 주었다. 토를 달지도, 다그치지도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눈을 맞춰온다. 결국 서운했던 것은 휴가에게가 아니었다. 그런 제멋대로의 심한 소리를 터트리는 순간에 깨달았던 것 같다. 자신은 단지 휴가와 함께 할 수 없었던 그 한 번의 연습이 아쉬워서, 미치도록 화가 날 만큼 너무나 아쉬워서, 그래서 괜한 화풀이를 휴가에게 했을 뿐이었다. 이렇게나 하루가 소중한데. 이렇게나 하루가 가는 것이 불안한데. 그 불안함 속에 휴가가 없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이나 심장이 아팠던 것이다. 닳을 대로 닳아버린 이 무릎보다도 더, 아팠던 것이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며 바라다 본 휴가의 눈동자는 마치 그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 키요시는 또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휴가.”
“응.”
“…휴가.”
“그래.”
“휴가…….”
세 번째 이름을 불렀을 때, 휴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한 손을 올려 키요시의 눈가에 맺힌 것을 닦아내곤 두어번 어깨를 다독인다.
미안해-.
삼켜질 듯 속삭인 키요시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피식 하고 소리를 내며 멍청아- 라고 말하는 휴가의 미소는 정말이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썩어가던 뿌리는 세상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장을 죄여오던 질척한 감정도 더 이상은 없었다. 그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키요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휴가. 자신을 인도하는 따스한 태양.
키요시는 흩날리는 아침 햇살을 한 가득 담은 젖은 얼굴로, 휴가의 아름다운 미소에 화답하듯 웃음 지었다.
안녕하세요, 비도입니다. 저는 지금 달리는 차안에서 후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으니 이 배포본이 나오기는 한 모양이군요(눈물). 사실 저는 비도님이 아니라 같은 부스의 Tat입니다. 운전 중인 비도님을 대신해 대리후기를 쓰고 있습니다. 받아쓰기중이에요. 비도님이 말합니다. 후기가 개그라고.
각설하고, 원래 모든 연성러들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책을 쓰지만 이 책은 정말 자기만족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포본은 사실 작년 대선 때 ‘투표율이 74%가 넘으면 기분이 좋을 테니까 기분 좋은 나를 위해 목일 배포본을 내자!’라고 저 자신에게 공략했던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 약속을 지켰어요. 정말 장하다 김비도.
작업을 하면서 다른 원고 마감을 치느라 힘이 들긴 했습니다. 몇 번이나 하지 말까 싶기도 했지만 농구 첫 책이 목일이 아닌 것에 대한 저의 분노를 여기에 쏟아 붓고 싶었던 마음도 없다고 할 수는 없네요. 하핫. 아참,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글에서 휴가가 연습을 빠진 이유는 사실 쵸콜렛 때문이었어요. 그 날 마지막 가사시간에 키요시를 생각하며 쵸콜렛 만들기 실습을 하던 휴가는, 잘 되지 않자 어떻게든 완성을 시켜 키요시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연습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쵸콜렛을 만들........었다는 것은 저의 망상입니다.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이 각박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일목일을 외쳐주시는 모든 목일러분들에게 이 배포본을 바칩니다. 목일 많이 사랑해주세요. 이상 비도였습니다. 비도님이 저 멀미 하는지 걱정해주시는데 다행히 저는 멀미를 하지 않습니다. Tat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현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퉁명한 것인지 친절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휴가의 목소리와 달콤하게 풍겨오는 밥 냄새였다. 달짝지근한 향기 속에 섞인 국 끓는 소리가 정겹다. 평소에 자주 드나들던 곳이지만 코끝을 자극하는 낯선 음식 내음에 쉽사리 발길이 들여지지 않는다. 휴가, 하고 작게 부르자 불쑥 눈앞으로 내밀어진 주걱에는 설기설기 흰 밥알이 묻어있었다.
“뭘 그렇게 뜸을 들여. 빨리 들어오지 않고.”
“하하. 그럼 실례.”
오늘따라 떨어지지 않으려는 쑥스러운 걸음을 달래 억지로 거실을 디딘다. 평소와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앞서가는 휴가의 등이 낯설어 키요시는 머리를 긁적였다.
“부모님은?”
“나가셨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맘 놓고 들어와.”
“흐음, 뭘 하고 있었는데?”
평소처럼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방으로 향하는 휴가의 걸음을 뒤따르며 키요시가 물었다. 이미 집안 가득히 흘러넘치는 향기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 휴가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생소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면 몰라?”
그런 키요시를 슬쩍 돌아보며 던진 휴가의 한 마디가 그의 생소함을 선명한 형태의 확신으로 바꾼다.
“……밥한다.”
“…….”
정말로 밥? 그 휴가가? 지금 당장 집으로 놀러오라고 연락을 할 때부터 수상하긴 했지만, 막상 달려와 보니 떠안겨진 상황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장면 앞에서 키요시는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침묵으로 돌아서는 휴가와 키요시 사이에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의 요동만이 가득했다. 키요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냄비로 향했다가, 차오른 뚜껑을 열어 거품을 걷어내는 휴가의 손끝에 닿는다. 작은 숟가락으로 맛을 보고 소금통을 열어 간을 맞추는 휴가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 그 하얗고 긴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귓등은 붉은 봉선화처럼 물들어간다.
아아, 그래. 그렇구나. 당황함으로 얼룩져있던 키요시의 얼굴이 희미하게 풀어졌다. 처음부터 휴가와는 말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이 아닌 다른 형태로 충분히 전해지고 있다고 여겼기에 구태여 남기지 않아 왔다. 서로의 아픔에 대해 굳이 정형화된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무언의 약속이었다. 이미 눈짓으로 넘기는 패스의 짧은 여운 속에, 퉁명스럽게 건넨 커피 캔 한 잔 속에, 점심시간마다 들려주는 하모니카 연주소리에, 그리고 이렇게 함께 먹는 한 끼의 식사 위에서 풍성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키요시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의아한 눈빛도, 당황하는 표정도 싣지 않았다. 이제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정확한지도 몰랐다. 그는 그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고 식탁에 앉아, 부드러움이 실린 눈빛으로 휴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요리를 할 때는 앞치마 정도는 해야지, 휴가.”
“됐어. 그런 건 거추장스러워.”
“내가 해줄까?”
“맞을래?”
한 손에 주걱을 들고 휙 돌아보는 휴가의 표정이 지나치게 살벌해 키요시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제대로 맞춰온 듯 키요시가 식탁에 앉자마자 뜨끈한 국이며 솜씨를 발휘한 반찬거리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수저와 앞접시가 놓이고 그 옆에는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물 한 컵이 들어섰다. 아까부터 들고 다니던 주걱은 의외로 가장 마지막에 사용됐다. 휴가가 탁 소리가 나게끔 키요시의 앞에 김이 나는 밥 한 그릇을 내려놓는다.
“설마… 먹고 죽지는 않겠지?”
“내가 리코냐?”
농담같은 실갱이를 터트리며 키요시는 웃었다. 평소 그의 식성에 맞춰 적당량으로 담긴 흰 쌀밥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건강에 좋다는 잡곡이나 콩 같은 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천연의 쌀 그대로에서 휴가의 서투름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키요시는 젓가락을 들었다. 큼지막하게 떠서 한웅큼을 입으로 가져갔다. 쌀밥 특유의 단내음이 혀끝을 타고 입안 가득히 퍼져간다.
누군가가, 가까운 사람이 해준 밥을 먹는 게 얼마만이더라. 줄곧 무릎의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는 동안 먹었던 병원밥은 인위적인 단맛에 물들어 차가웠다. 병원이라는 곳이 어딘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하루하루 숨통을 죄여오는 것 같은 그 하얀색은 제법 섬칫하게 느껴진다. 싸늘하게 치장된 병실의 하얀 벽지와 바닥의 타일들, 입고 있는 옷이나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되어주었던 창틀까지도,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 없는 깨끗한 색을 품고 있었다. 가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하얗게 내리쬐던 형광등 불빛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어 항시 머물 수 없었기에 덩그러니 놓인 병원밥은 혼자 먹는 날이 많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 하얀 밥에는 이제 신물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먹을만 하냐?”
마주 앉아 턱을 괴곤, 퉁명스럽게 물어오는 휴가의 표정은 딱히 부드럽다거나 다정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가 건네준 하얀 밥에서는 여전히 온기가 피어올랐다. 하얀 것은 온통 차갑게 식어가는 두려움의 일환인 줄 알았건만, 세상에는 이렇게 따뜻한 깨끗함도 존재하고 있다.
“흐훠어!”
“…? 뭐라고?”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어오는 휴가의 찌푸려진 미간에도 여전히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온기가 묻어있다고. 키요시는 입안을 맴도는 단 맛을 힘껏 삼키며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
뜨거워, 휴가.
하얗게 물든 한 톨의 밥알도, 하얗게 빛나는 너의 마음도.
하얗게 하얗게 세상을 채워가는 이 식탁 위의 작은 온기마저도.
들리지 않을 말이 무엇을 타고 전해졌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그에게 닿은 것인지 휴가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휴가의 찌푸려진 미소는 서투름마저도 전부 그 하얀 밥 아래 묻혀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식탁 위로 스며드는 하얀 온기가 뜨겁다. 차갑게 식어버렸던 두터운 벽의 아픔마저도 시원스레 태워 줄 것처럼.
개인적으로 하쿠 >> 슈 느낌을 더 좋아하지만 슈 > 하쿠 > 츠루기도 제법....! 올ㅋㅋㅋ 제법인데?ㅋㅋ
# 그런데 사실 제로조에 대해서 아는게 많지 않아서.. 그냥 제 안에 있는 '제로조의 느낌'을 썼습니닼ㅋㅋㅋㅋㅋ
# 본격_주제도_내용도_흐름도_결말도_없는_제로조_연성물.hwp
".....슈?"
찾고있던 실루엣이 눈 앞에 나타난다. 하쿠류는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슈는 대답이 없다. 듣지못한 것인지 미동조차 없었다. 슈의 시선을 앗아간 것이 무엇인지 하쿠류의 위치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친숙한 뒷모습이 낮게 쭈그려있을 뿐. 하쿠류는 조금 인상을 구겼다. 녀석은 지나치게 태평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궁극에 가까워지기 위해 일분일초가 중요한 때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래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
하지만 타박은 나오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소리에도 요동하지 않는 이유. 모두가 필사적인 이 때에 그를 한가롭게 만드는 것의 정체. 하쿠류는 슈가 바라보는 것을 향해 다가간다. 나름대로 발소리도 죽이며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이 불렀는데도 알지 못할 정도의 집중력이라니. 연습시간도 잊어버리고 몰두할 만큼의 중요성이 있는 것일까. 그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에 담기고 있을 그 어떤 것에 대해서. 하쿠류는 조금, 궁금해졌다.
"....개미야."
".......!"
언제부터 자신이 왔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을까. 처음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아니면 조심조심 다가가던 순간에? 묻지도 않았는데 슈에게서 대답이 나온 덕분에 하쿠류는 흠칫 놀라 물러섰다. 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계속해서 그래왔듯이, 그저 한 장소에 눈길이 머물러 요동하지 않았다. 개미. 개미 행렬인가. 작고 검은 것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제법 빠르게 움직였다. 조밀조밀한 더듬이와 검은 몸뚱이. 하쿠류의 시선이 자연스레 슈를 향해 옮겨간다. 슈와 개미, 조금 닮았나? 개미떼에 집중되어있는 눈빛은 아이처럼 순수했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는 두어번 헛기침을 흘렸다.
"뭘 하는거냐. 다들 널 찾고있다고. 대체 이런 곳에서 무슨 쓸떼없는 ㅈ...."
"참 열심히 살고있지?"
하쿠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의 근원지를 쫓는다. 어디일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늘 이런식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녀석에게는. 이 녀석 만큼은 마음대로 주물러지지 않는다. 하쿠류는 작게 한숨을 흘리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그야, 개미니까."
"......그런가?"
여태까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던 주제에 조금,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슈가 말하는 것과 슈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하쿠류가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슈와의 대화는 어쩐지 어렵다. 알듯말듯한 모호함이 그 안에 숨어있어 쉽사리 찾아낼 수 없었다. 저 녀석이 바라보는 이상. 저 녀석이 찾고싶어하는 그 어떤 것. 쉽사리 발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슈는 궁극에 가깝다. 적어도 하쿠류는 그렇게 믿었다. 그는 물끄러미 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지천에 널려있는 개미떼의 모습 그 어디에서 스스로의 삶과 마주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슈 스스로도 모를 일인지도. 갑자기 슈가 옷을 털며 일어선다. 하쿠류는 빠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슈라면 그런 하쿠류의 움직임마저 알아챘을지도 모르지만. 괜히 팔짱을 끼며 등을 돌렸다. 빨리 돌아가자. 앞장 서서 걷기 시작한다.
슈는 잠시 웃었다. 개미떼에게 작별을 고하고,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궁극의 색을 닮은 하쿠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앞서 걷는 하쿠류의 걸음걸이 사이사이로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친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바람을 닮은 머릿결도, 무표정한 눈빛도, 그 뒤에 숨어있는 아이같은 서투름도. 모두, 손에 닿을 것 같다. 하지만 슈는 웃는다. 그저 쓸쓸한 듯, 작게 웃으며 하쿠류의 뒤를 따랐다.
"요즘 츠루기랑은 어때?"
슈가 묻는다. 하쿠류의 걸음이 멎었다. 그는 말없이 슈를 돌아보며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노려보는듯도 했지만 슈는 익숙한 듯 눈빛을 흘린다.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조용하게 물었다.
"여전히 찬바람 맞고있어?"
"......."
진심이다. 장난이 담긴 물음은 아니었다. 낯선 질문도 아니다. 하지만 하쿠류는 언제나 그랬듯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슈는 조금 쓸쓸한듯 웃었다. 그건 참 힘들겠다, 하쿠류. 위로하며 말한다. 그러나 슈의 목소리는 하쿠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츠루기 쿄스케. 그에 대해 생각한다. 하쿠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슈가 다시 그 뒤를 따랐다. 츠루기를, 그 녀석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쿠류가 말하기 시작한다. 슈가 귀를 기울였다. 그 녀석, 피프스 섹터를 배신했대. 하쿠류의 말이 이어진다. 슈는 계속해서 귀기울였다. 이제 그 녀석은 어떻게 되는걸까. 하쿠류의 걸음이 멈춘다. 덩달아 슈의 걸음도 멈췄다.
"너무 걱정하지마, 하쿠류. 전부 잘 될거야."
슈는 또 다시 웃었다. 하쿠류의 시선은 하늘 높은 곳, 갓 에덴을 벗어난 저 하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슈는 그것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츠루기를 동경한다.'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하쿠류의 지난 목소리를 기억해본다. 동경한다는 의미 속에 감춰져있던 실제들을 기억해냈다. 말로 표현해낼 수 없었던, 하쿠류의 마음 깊은 곳에 담겨두어야만 했던. 그것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동경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의 감정을 알았다. 그 자신이었기에 알았으리라. 그 자신이었기에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도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를 용서할 수 없었으리라. 슈는 하쿠류의 심장 속을 가득 메운 두 개의 감정을 알았다. 그리고 그 감정 앞에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역할임을, 슈는 알고있었다.
하쿠류는 다시 걸었다. 슈가 다시 그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은 양성소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닿지 않은 침묵만이 공허한 바람 소리를 품은 채 그 자리를 맴돈다. 그 곳에 궁극을 향해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서투른 두 사람 또한 그곳에 있다. 오랜 시간 계속된 두 사람의 침묵은 함께 나아가야 할 장소 앞에서 깨져버렸다. 하쿠류도, 그리고 슈도.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일상임을 느낀다. 열심히 살고있지? 그 질문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누구를 위한 물음인지, 누구를 위해 필사적인 것인지. 하쿠류는 공을 날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