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퉁명한 것인지 친절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휴가의 목소리와 달콤하게 풍겨오는 밥 냄새였다. 달짝지근한 향기 속에 섞인 국 끓는 소리가 정겹다. 평소에 자주 드나들던 곳이지만 코끝을 자극하는 낯선 음식 내음에 쉽사리 발길이 들여지지 않는다. 휴가, 하고 작게 부르자 불쑥 눈앞으로 내밀어진 주걱에는 설기설기 흰 밥알이 묻어있었다.
“뭘 그렇게 뜸을 들여. 빨리 들어오지 않고.”
“하하. 그럼 실례.”
오늘따라 떨어지지 않으려는 쑥스러운 걸음을 달래 억지로 거실을 디딘다. 평소와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앞서가는 휴가의 등이 낯설어 키요시는 머리를 긁적였다.
“부모님은?”
“나가셨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맘 놓고 들어와.”
“흐음, 뭘 하고 있었는데?”
평소처럼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방으로 향하는 휴가의 걸음을 뒤따르며 키요시가 물었다. 이미 집안 가득히 흘러넘치는 향기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 휴가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생소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면 몰라?”
그런 키요시를 슬쩍 돌아보며 던진 휴가의 한 마디가 그의 생소함을 선명한 형태의 확신으로 바꾼다.
“……밥한다.”
“…….”
정말로 밥? 그 휴가가? 지금 당장 집으로 놀러오라고 연락을 할 때부터 수상하긴 했지만, 막상 달려와 보니 떠안겨진 상황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장면 앞에서 키요시는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침묵으로 돌아서는 휴가와 키요시 사이에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의 요동만이 가득했다. 키요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냄비로 향했다가, 차오른 뚜껑을 열어 거품을 걷어내는 휴가의 손끝에 닿는다. 작은 숟가락으로 맛을 보고 소금통을 열어 간을 맞추는 휴가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 그 하얗고 긴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귓등은 붉은 봉선화처럼 물들어간다.
아아, 그래. 그렇구나. 당황함으로 얼룩져있던 키요시의 얼굴이 희미하게 풀어졌다. 처음부터 휴가와는 말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이 아닌 다른 형태로 충분히 전해지고 있다고 여겼기에 구태여 남기지 않아 왔다. 서로의 아픔에 대해 굳이 정형화된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무언의 약속이었다. 이미 눈짓으로 넘기는 패스의 짧은 여운 속에, 퉁명스럽게 건넨 커피 캔 한 잔 속에, 점심시간마다 들려주는 하모니카 연주소리에, 그리고 이렇게 함께 먹는 한 끼의 식사 위에서 풍성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키요시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의아한 눈빛도, 당황하는 표정도 싣지 않았다. 이제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정확한지도 몰랐다. 그는 그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고 식탁에 앉아, 부드러움이 실린 눈빛으로 휴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요리를 할 때는 앞치마 정도는 해야지, 휴가.”
“됐어. 그런 건 거추장스러워.”
“내가 해줄까?”
“맞을래?”
한 손에 주걱을 들고 휙 돌아보는 휴가의 표정이 지나치게 살벌해 키요시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제대로 맞춰온 듯 키요시가 식탁에 앉자마자 뜨끈한 국이며 솜씨를 발휘한 반찬거리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수저와 앞접시가 놓이고 그 옆에는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물 한 컵이 들어섰다. 아까부터 들고 다니던 주걱은 의외로 가장 마지막에 사용됐다. 휴가가 탁 소리가 나게끔 키요시의 앞에 김이 나는 밥 한 그릇을 내려놓는다.
“설마… 먹고 죽지는 않겠지?”
“내가 리코냐?”
농담같은 실갱이를 터트리며 키요시는 웃었다. 평소 그의 식성에 맞춰 적당량으로 담긴 흰 쌀밥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건강에 좋다는 잡곡이나 콩 같은 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천연의 쌀 그대로에서 휴가의 서투름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키요시는 젓가락을 들었다. 큼지막하게 떠서 한웅큼을 입으로 가져갔다. 쌀밥 특유의 단내음이 혀끝을 타고 입안 가득히 퍼져간다.
누군가가, 가까운 사람이 해준 밥을 먹는 게 얼마만이더라. 줄곧 무릎의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는 동안 먹었던 병원밥은 인위적인 단맛에 물들어 차가웠다. 병원이라는 곳이 어딘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하루하루 숨통을 죄여오는 것 같은 그 하얀색은 제법 섬칫하게 느껴진다. 싸늘하게 치장된 병실의 하얀 벽지와 바닥의 타일들, 입고 있는 옷이나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되어주었던 창틀까지도,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 없는 깨끗한 색을 품고 있었다. 가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하얗게 내리쬐던 형광등 불빛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어 항시 머물 수 없었기에 덩그러니 놓인 병원밥은 혼자 먹는 날이 많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 하얀 밥에는 이제 신물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먹을만 하냐?”
마주 앉아 턱을 괴곤, 퉁명스럽게 물어오는 휴가의 표정은 딱히 부드럽다거나 다정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가 건네준 하얀 밥에서는 여전히 온기가 피어올랐다. 하얀 것은 온통 차갑게 식어가는 두려움의 일환인 줄 알았건만, 세상에는 이렇게 따뜻한 깨끗함도 존재하고 있다.
“흐훠어!”
“…? 뭐라고?”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어오는 휴가의 찌푸려진 미간에도 여전히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온기가 묻어있다고. 키요시는 입안을 맴도는 단 맛을 힘껏 삼키며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
뜨거워, 휴가.
하얗게 물든 한 톨의 밥알도, 하얗게 빛나는 너의 마음도.
하얗게 하얗게 세상을 채워가는 이 식탁 위의 작은 온기마저도.
들리지 않을 말이 무엇을 타고 전해졌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그에게 닿은 것인지 휴가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휴가의 찌푸려진 미소는 서투름마저도 전부 그 하얀 밥 아래 묻혀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식탁 위로 스며드는 하얀 온기가 뜨겁다. 차갑게 식어버렸던 두터운 벽의 아픔마저도 시원스레 태워 줄 것처럼.
개인적으로 하쿠 >> 슈 느낌을 더 좋아하지만 슈 > 하쿠 > 츠루기도 제법....! 올ㅋㅋㅋ 제법인데?ㅋㅋ
# 그런데 사실 제로조에 대해서 아는게 많지 않아서.. 그냥 제 안에 있는 '제로조의 느낌'을 썼습니닼ㅋㅋㅋㅋㅋ
# 본격_주제도_내용도_흐름도_결말도_없는_제로조_연성물.hwp
".....슈?"
찾고있던 실루엣이 눈 앞에 나타난다. 하쿠류는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슈는 대답이 없다. 듣지못한 것인지 미동조차 없었다. 슈의 시선을 앗아간 것이 무엇인지 하쿠류의 위치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친숙한 뒷모습이 낮게 쭈그려있을 뿐. 하쿠류는 조금 인상을 구겼다. 녀석은 지나치게 태평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궁극에 가까워지기 위해 일분일초가 중요한 때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래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
하지만 타박은 나오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소리에도 요동하지 않는 이유. 모두가 필사적인 이 때에 그를 한가롭게 만드는 것의 정체. 하쿠류는 슈가 바라보는 것을 향해 다가간다. 나름대로 발소리도 죽이며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이 불렀는데도 알지 못할 정도의 집중력이라니. 연습시간도 잊어버리고 몰두할 만큼의 중요성이 있는 것일까. 그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에 담기고 있을 그 어떤 것에 대해서. 하쿠류는 조금, 궁금해졌다.
"....개미야."
".......!"
언제부터 자신이 왔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을까. 처음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아니면 조심조심 다가가던 순간에? 묻지도 않았는데 슈에게서 대답이 나온 덕분에 하쿠류는 흠칫 놀라 물러섰다. 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계속해서 그래왔듯이, 그저 한 장소에 눈길이 머물러 요동하지 않았다. 개미. 개미 행렬인가. 작고 검은 것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제법 빠르게 움직였다. 조밀조밀한 더듬이와 검은 몸뚱이. 하쿠류의 시선이 자연스레 슈를 향해 옮겨간다. 슈와 개미, 조금 닮았나? 개미떼에 집중되어있는 눈빛은 아이처럼 순수했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는 두어번 헛기침을 흘렸다.
"뭘 하는거냐. 다들 널 찾고있다고. 대체 이런 곳에서 무슨 쓸떼없는 ㅈ...."
"참 열심히 살고있지?"
하쿠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의 근원지를 쫓는다. 어디일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늘 이런식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녀석에게는. 이 녀석 만큼은 마음대로 주물러지지 않는다. 하쿠류는 작게 한숨을 흘리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그야, 개미니까."
"......그런가?"
여태까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던 주제에 조금,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슈가 말하는 것과 슈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하쿠류가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슈와의 대화는 어쩐지 어렵다. 알듯말듯한 모호함이 그 안에 숨어있어 쉽사리 찾아낼 수 없었다. 저 녀석이 바라보는 이상. 저 녀석이 찾고싶어하는 그 어떤 것. 쉽사리 발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슈는 궁극에 가깝다. 적어도 하쿠류는 그렇게 믿었다. 그는 물끄러미 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지천에 널려있는 개미떼의 모습 그 어디에서 스스로의 삶과 마주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슈 스스로도 모를 일인지도. 갑자기 슈가 옷을 털며 일어선다. 하쿠류는 빠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슈라면 그런 하쿠류의 움직임마저 알아챘을지도 모르지만. 괜히 팔짱을 끼며 등을 돌렸다. 빨리 돌아가자. 앞장 서서 걷기 시작한다.
슈는 잠시 웃었다. 개미떼에게 작별을 고하고,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궁극의 색을 닮은 하쿠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앞서 걷는 하쿠류의 걸음걸이 사이사이로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친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바람을 닮은 머릿결도, 무표정한 눈빛도, 그 뒤에 숨어있는 아이같은 서투름도. 모두, 손에 닿을 것 같다. 하지만 슈는 웃는다. 그저 쓸쓸한 듯, 작게 웃으며 하쿠류의 뒤를 따랐다.
"요즘 츠루기랑은 어때?"
슈가 묻는다. 하쿠류의 걸음이 멎었다. 그는 말없이 슈를 돌아보며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노려보는듯도 했지만 슈는 익숙한 듯 눈빛을 흘린다.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조용하게 물었다.
"여전히 찬바람 맞고있어?"
"......."
진심이다. 장난이 담긴 물음은 아니었다. 낯선 질문도 아니다. 하지만 하쿠류는 언제나 그랬듯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슈는 조금 쓸쓸한듯 웃었다. 그건 참 힘들겠다, 하쿠류. 위로하며 말한다. 그러나 슈의 목소리는 하쿠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츠루기 쿄스케. 그에 대해 생각한다. 하쿠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슈가 다시 그 뒤를 따랐다. 츠루기를, 그 녀석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쿠류가 말하기 시작한다. 슈가 귀를 기울였다. 그 녀석, 피프스 섹터를 배신했대. 하쿠류의 말이 이어진다. 슈는 계속해서 귀기울였다. 이제 그 녀석은 어떻게 되는걸까. 하쿠류의 걸음이 멈춘다. 덩달아 슈의 걸음도 멈췄다.
"너무 걱정하지마, 하쿠류. 전부 잘 될거야."
슈는 또 다시 웃었다. 하쿠류의 시선은 하늘 높은 곳, 갓 에덴을 벗어난 저 하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슈는 그것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츠루기를 동경한다.'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하쿠류의 지난 목소리를 기억해본다. 동경한다는 의미 속에 감춰져있던 실제들을 기억해냈다. 말로 표현해낼 수 없었던, 하쿠류의 마음 깊은 곳에 담겨두어야만 했던. 그것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동경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의 감정을 알았다. 그 자신이었기에 알았으리라. 그 자신이었기에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도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를 용서할 수 없었으리라. 슈는 하쿠류의 심장 속을 가득 메운 두 개의 감정을 알았다. 그리고 그 감정 앞에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역할임을, 슈는 알고있었다.
하쿠류는 다시 걸었다. 슈가 다시 그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은 양성소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닿지 않은 침묵만이 공허한 바람 소리를 품은 채 그 자리를 맴돈다. 그 곳에 궁극을 향해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서투른 두 사람 또한 그곳에 있다. 오랜 시간 계속된 두 사람의 침묵은 함께 나아가야 할 장소 앞에서 깨져버렸다. 하쿠류도, 그리고 슈도.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일상임을 느낀다. 열심히 살고있지? 그 질문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누구를 위한 물음인지, 누구를 위해 필사적인 것인지. 하쿠류는 공을 날리며 물었다.
# 키도는 워낙에 빈틈이 없으니까... 가끔 빈틈을 보여주는 키도 너무 좋아요 귀여워...!
# 엔도키도
한낮의 그라운드 위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잔디를 스치는 둥근 공과, 공을 뒤쫓는 발소리. 앞다투어 몸을 부딪치는 아이들의 얼굴은 열정을 품고 있어 아름다웠다. 공이 움직이는데로, 아이들이 달리는데로, 엔도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이런 풍경이 그리웠다. 라이몬을 떠나 성제의 뒤를 쫓는 동안 내내 그리웠던 풍경이다. 앉아있는 벤치 위로 여유로운 바람이 흘러들었다. 그라운드에 떨어지는 작은 아이들의 땀이 사랑스럽다. 달려가는 걸음과, 주먹 쥔 작은 손과, 흙투성이가 되어가는 축구공을 보면 늘 몸이 근질거렸다. 함께 달려들어 정신없이 공을 쫓고 싶다. 오랜만에 마주대하는 풍경은 그립고 또 그리워 엔도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키도 네 말대로야. 역시 신도의 빈 자리가 크긴 하지만, 텐마라면 잘 해 갈거야."
"........"
엔도는 그라운드에 눈을 고정시킨 채, 옆에 앉은 키도에게 중얼거렸다. 텐마는 아직 어리고 아직 미숙하지만 축구에 대한 마음만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렇기에 팀원들의 지지대가 되어갈거라 믿었다. 아직까지 텐마의 미숙함을 채워주는 것은 산고쿠였다. 신도의 부재탓일까. 산고쿠는 무의식 중에 맏형노릇을 해야한다는 것을 느끼는 듯 했다. 어느 때보다 열심인 그의 목소리가 텐마와 모두를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키퍼를 니시조노로 교체하고 나면 디펜더가 좀 더 강화되야 할 필요가 있어. 키도. 네 생각은 어때? 실력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 니시조노는......"
그러나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심각하게 중얼거리던 엔도의 목소리는 거기에서 멈춰버렸다. 툭, 소리와 함께 무거운 무언가가 어깨 위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굳어버린듯 엔도는 움직임을 멈췄다. 숨소리도 내지않았다. 귓가에서 들리는 숨소리는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엔도는 당황한 표정으로 살며시 눈동자를 돌렸다. 자신의 단단한 어깨 위에서 가볍게 숨을 쉬는 것은, 낯선, 아니 낯설지 않은 그 무언가였다.
"키, 키도....?"
방금 세탁기에서 나온 빨래감에 코를 묻을 때처럼, 머릿결 마디마다 묻은 상쾌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온다. 감긴 눈. 쌔근쌔근 들려오는 속삭임. 어깨 위로 전해지는 온기는 아이처럼 따뜻했다. 자연스럽게 늘어진 손 끝에 힘이 풀려있다. 그가 들고있던 고글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에 무척 당황했던 엔도는 그 장면을 보며 서서히 웃음을 되찾았다. 맙소사. 키도답지 않았다. 고글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잠을 자는 키도라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엔도는 다시 푸른 하늘 위로 시선을 돌리며 키도가 기대기 편하도록 어깨에 힘을 풀었다. 틀림없이 부담이었을테지. 자신이 없는 동안 라이몬을 감당해 준 키도가 얼마나 쉬지않고 여기까지 달려왔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서, 라이몬을 최상의 팀으로 이끌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키도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아마 그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려버렸기 때문이겠지. 저도 모르게 곯아떨어진 키도라니.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니만큼 괜히 웃음지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앗, 코치님 위험ㅎㅡ!!"
조금은 즐거운듯한 엔도의 상념이 깨진 것은 다급하게 외쳐오는 텐마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엔도는 날카롭게 달려드는 바람소리 앞에서 반사적으로 반대편 손을 뻗었다. 탕!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잠시간의 정적. 일이 벌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키도의 얼굴 바로 앞에서 축구공의 기세가 멎었다. 엔도의 반응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키도의 안면을 강타했을 위협이었다. 엔도의 손에 맞아 힘을 잃은 축구공은 바닥을 구르며 통, 통 소리를 냈다. 황급히 달려온 텐마의 발자국 곁을 지나 그대로 그라운드로 흘러들어간다. 텐마는 엔도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대로 조절을 못해서 그만....!"
"쉿! 쉿...! 괜찮으니까 일단 조용히 해줄래?"
"예?"
평소답지 않은 감독님의 작은 목소리. 괜찮다며 웃어넘길 것 같았던 엔도의 반응은 어쩐지 절실하기까지 했다. 텐마와, 그 뒤를 쫓아 달려온 동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진땀을 흘리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엔도 감독. 그리고 그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것은 틀림없는.......
"코치님?"
누군가가 헉 소리를 냈다. 엔도가 다시 조용히 하라는 싸인을 보내자 놀란 아마기는 아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두 눈에 들어찬 당황스러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키도 코치님이 엔도 감독님의 어깨에 기대서 자고있다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풍경에 모두의 사고가 정지했다. 텐마는 무례하게도 손가락으로 키도를 가리키며 황당한 표정을 흘려댔다. 엔도는 그저 멋쩍은 듯 웃음지었다. 진짜. 이거 진짜인가. 믿기든 믿기지않든 눈 앞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키도 코치였고, 그는 이 정도의 소란에도 눈을 뜨지 않을만큼 깊이 잠들어있었다. 그가 감독으로 있을 때는 연습 중에 조는 것은 고사하고, 학생들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기대어 잠들어있는 코치란 어쩐지 낯설고 어쩐지 여태까지 알아왔던 코치와는 동떨어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코치님도 주무시는구나. 누군가가 또 다시 중얼거리자 나머지 아이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들 약속이나 한듯 잠든 키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평소에는 인상을 찡그리는 일이 많은데다 고글까지 쓰고 있어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속눈썹도 길고 피부도 하얀 것이 꽤 여성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우리 코치님, 그렇게 인상이 강한 분은 아니었네. 작게 벌어진 입술은 촉촉하게 빛났고 살짝 기울어진 바람에 드러난 목선은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이상하게도 그 부드러운 목선으로 자꾸 시선이 움직였다. 자신의 눈동자가 아닌 것 마냥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렸다.
"에헴!... 그러니까... 에.... 타, 타월이라도 덮어드리는게 좋겠구려!"
침묵을 깨고 간신히 말을 꺼낸 것은 니시키였다. 그는 쭈뼛쭈뼛한 움직임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키도의 한쪽 어깨 위에 살며시 타월을 걸쳤다. 닿으면 깨어날까싶은 느리고 섬세한 동작이었다. 가만히 있기 뻘쭘했던 탓인지, 아니면 때아닌 모성애에 눈을 떴는지, 니시키를 시작으로 라이몬 아이들은 하나둘씩 다가와 저마다의 타월을 덮었다. 키도 코치 위로 하나 둘씩 하얀 타월이 덮어졌고 마지막으로 장난끼 가득한 얼굴의 하마노가 자기 타월에서 손을 뗐을 무렵에는, 이미 키도의 모습은 타월산 아래 묻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저기 타월로 뒤덮혀 얼굴까지 푹 쌓여버렸다. 난감한 표정의 엔도가 얼굴을 덮은 타월을 걷어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키도의 호흡은 상쾌한 공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우린 다시 연습이오!"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키도의 앞에서 싱글거리는 웃음을 짓던 니시키는 손뼉을 딱 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심장이 철렁이며 내려앉았다. 니시키는 경악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놈의 '철썩'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길게 묶어내린 머리카락에 무언가가 닿은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자고있던 누군가의 얼굴같은 걸 때렸다거나..... 얼어붙은 니시키의 동공에, 그 '누군가'의 홍옥빛 눈동자가 담긴다. 졸음 가득한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으음....."
키도 코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 일어났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몰랐다. 단지, 수건의 산을 쌓아도 꿈쩍하지 않던 키도의 눈이 꿈뻑거리며 떠졌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눈꺼풀 아래 감춰져있던 붉은 눈동자가 졸음을 담은 채 몇번인가 깜빡였다. 한번. 두번. 세번. 그리고 그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 아니요 그게.....!"
"여, 연습...!"
"연습하러 가겠습니다ㅡ!!"
"열심히 하겠습니다!!"
키도의 질문이 열쇠가 된 듯, 얼빠져있던 라이몬 아이들이 앞다투어 몰려나갔다. 당황한 표정으로 얼어붙었던 니시키가 선두였고,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들 재빠른 움직임이였다. 키도는 눈을 비비며 부시시한 표정을 했다. 뭔가 피하듯 도망쳐버렸다...? 키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문 모를 일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키도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엔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부터 눈물까지 흘려가며 즐겁다는 듯 웃는 엔도의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엔도. 무슨 일이냐. 왜 웃는거지?"
"하하하! 아무 것도 아니야, 키도! 큭큭. 정말 아무 것도 아니야!"
"......."
뭔가 놀림감이 된 것 같은 기분. 키도는 여지껏 힘없이 떨궈져있던 두 손을 모으며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포기한듯 키도는 그라운드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세상이 뭔가 너무 선명한게.... 뭔가 허전한데. 뭐지? 뭐가 허전한거지? 키도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이 덜깼는지 자신이 뭘 찾는지도 모른 채 뭔가를 열심히 찾아댄다. 엔도는 그런 키도가 재밌는 듯 또 다시 한참을 웃었다. 영 이해할 수 없다는 키도의 눈초리를 받고 나서야 간신히 웃음이 멈춘다. 어딘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눈이 가려지지 않으니 조금 더 키도의 감정이 쉽게 드러나는 듯 싶었다. 엔도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고글을 집어들었다.
"이거. 필요하지?"
"응?"
그게 왜 거기에?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키도의 얼굴 위로, 엔도는 가만히 고글을 씌웠다. 간만에 마주한 키도의 붉은 눈동자가 고글 속에 가려지는 건 꽤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마저 고글을 씌우고나서, 키도의 머리를 두어번 토닥였다. 아이처럼 다독여진 키도의 표정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다. 엔도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다고, 키도."
".....내가 피곤해보였나? 아니. 결승전이 얼마 안남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뭐 그렇기야 하지만.... 이젠 내가 있으니까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충분히 필요한 만큼은 휴식하고 있으니 괜찮다, 엔도. 신경써줘서 고맙군."
키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라운드에 집중한다. 엔도는 그런 키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미소지었다. 그래. 함께 있어 다행이다. 네가 있어주어 다행이야. 키도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묵묵히 옆에 있으면서 자신을 받쳐주었다. 애쓰고 또 노력해서 한 시합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었다. 그것이 어린 키도가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다는 것을 그 때는 왜 몰랐을까. 힘껏 달리면 나와 마찬가지로 지칠 수 있고, 때로는 기댈 곳이 필요하기도 한 어린 아이라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 때는 키도의 등이 너무나 커서, 언제나 불평같은 건 한번도 하지 않고 묵묵히 모두를 받쳐주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엔도는 다시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다시는 너 혼자 모든 짐을 지고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다시는 혼자 외롭게 두지 않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테니까. 키도는 바로 곁에 있었고 그리고 자신은 더 이상 그 때의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히 외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너와 내가 함께 일으킨 이 혁명의 바람, 끝까지 지지않고 가져가 우리들의 소중했던 것을 함께 되찾아오자. 잃어버린 우리들의 축구를, 되찾아오자. 엔도는 푸르디 푸른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몇번이고 그렇게 다짐했다.
# 렙파가 고엔지를 부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엔도하고 찌잉- 하는 걸 많이 만들어주어서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그 바람에 '브레이크조'라는 이름으로 묶여버린 세 사람에서 키도가 도태되는 일이 종종 발생해서
그럴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이건 나를 위한 위안의 글.. 그리고 키도를 위한 위안의 글..
키도야 힘내...!
메아리
(성제x키도)
by. Bido Enhuki
나는 이나즈마 캐러밴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묵묵히 응시했다. 결승전이라는 무게감 때문인지,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대화는 제법 가라앉아있었다. 평소라면 가장 먼저 나서서 유쾌한 말들을 쏟아냈을 텐마마저 입을 꾹 다문채 주먹만 쥐었다폈다를 반복한다. 간간히 말을 걸어오는 신스케에게 짧게 대꾸하거나, 긴장풀라는 매니저들의 격려에 쭈뼛하게 대답하는게 전부. 텐마가 말이 없기에 덩달아 팀원 전체가 고요해졌다. 그것은 저 소년의 존재감이 신도를 대신할 만큼 이 무리 내에 크게 자리잡았다는 의미기도 했고, 아이들 모두가 이 결승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성제. 이시도 슈지. 결국 오늘의 시합은 그를 끌어내리려는 도전이자 일본대륙 내 축구계의 판도를 뒤엎기 위한 단 한번의 기회가 된다. 그런 시합에 임하는 것이니만큼 자연스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 무거움의 기원은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키도."
나는 걱정스러움이 실린 목소리에 반응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나즈마 캐러밴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엔도가 두 눈에 염려를 담은채 그곳에 서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묵묵히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엔도."
"그게....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래도 역시....."
볼을 긁적이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 심상치 않다. 그러나 나는 엔도가 하고싶은 말을 단숨에 알아챘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무엇을 신경쓰고 있는지가 전해져온다. 한 번의 눈짓으로 원하는 말을 전할 수 있을만큼, 우리들이 지나온 세월은 그렇게나 길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팀의 코치로써 엔도를 보필하고 그의 상태를 예리하게 살폈어야 하는 것은 내 역할인데 도리어 걱정이나 끼치고 있는건가. 나는 내가 짐작하고 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고엔지에 관한 것... 말이냐."
"....그래. 성제가 고엔지라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
성제가, 고엔지. 그래. 이제는 믿지 않으면 안될 만큼 너무나 당연해 진 사실.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 사실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던 자신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이후엔 금새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엔도에게까지 걱정을 끼쳤다면 대체 얼만큼이나 스스로의 동요함을 흘려보내고 있었다는 것일까. 나는 쓴 웃음을 지며 가만히 엔도를 응시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는지 엔도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해왔다.
"물론,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고엔지와 직접 맞부딪쳐야 하는건 엔도 바로 너다. 난 괜찮으니까 네 마음을 단단히 잡도록 해."
"......으응. 네가 그렇다면.... 알겠어!"
엔도는 한결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살짝 웃음지었다.
"그래도, 키도 네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
어린 아이같은 미소로 다정함을 건넨 엔도는 먼저 사라진 아이들의 뒤를 따라 승강장으로 달려간다. 나는 그런 엔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열차는 벌써 도착해있었고 앞다투어 열차에 오른 아이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열차에 오른 엔도가 내게 손짓했다. 그 손짓은 어쩐지, '함께있어 다행'이라는 엔도의 목소리를 뒷받침하듯 보였다. 하지만 서로가 옆에 있어 다행인 것은 엔도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인지도 몰랐다. 나는 천천히 승강장에 올라 엔도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리들은 함께 있다. 함께 있으면서 서로의 지지점이 되어준다. 그래서 정말로 다행이야. 하지만....
하지만 고엔지.
너는 어째서 함께 있을 수 없는걸까.
언제라도, 어느 순간에라도, 세 사람은 늘 함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함께'에서 고엔지가 사라졌다. 어떤 작은 징조나 어떤 작은 메세지도 남기지 않은 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는 그저 사라져버렸다. 어째서였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무슨 일이 생긴걸까. 계속해서 염려했다. 걱정하고, 그리워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결과를 맞이했다. 성제. 관리축구의 정점에 있는 자. 그는 돌아왔다. 하지만 단 한번도 상상한 적 없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자리는, 늘 함께였던 우리들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결코 우리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 그 어딘가일 것이다.
"....이시도 슈지?"
그러나 순간 들려온 엔도의 목소리에, 나는 잠겨있던 생각에서 벗어났다. 천천히 들어올리는 시야에 붉은 잔상이 비친다. 열차의 중앙을 가르는 차창 너머로 낯선 실루엣이 보였다. 어릴 적과 다름없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들어온 그는 언제고 만나리라 여기며 그리워해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복장도, 외모도,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단 한 가지 그 빛나는 흑안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고엔지...."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목소리가 닿았는지 잠시 그의 눈동자가 고글 너머 내 눈동자로 옮겨온다. 두 개의 눈동자가 맞부딪쳤다. 뜨겁다. 몸 속에서 거세게 숨을 쉬는 어떤 것이 온 몸을 뜨겁게 달궈온다. 그러나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타들어갈 것처럼 날뛰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시도 슈지는 빠르게 시선을 돌려 내 앞 자리에 앉았고 눈을 감았다. 가벼운 인사나 표정의 동요함조차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 곳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리들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그리고 스타디움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그는 단 한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한국팀 파이어 드래곤과 시합이 있던 날, 세계대회 아시아 예선 결승전에서, 고엔지는 어딘가 상태가 좋지 못했다. 어떤 시합이라도 전력을 다해 집중해왔던 고엔지였기에 그날 그가 보여준 태도는 정말이지 이상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묘하게 평소와 다르다는 것 쯤은 동료들 모두가 알고있었다. 토라마루는 물론이고 코구레나 카베야마까지도 눈치챌 정도였으니 나 또한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엔지에 대해서 엔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몇번이고 고엔지를 향해 던지는 엔도의 시선은 그가 고엔지의 상태에 대해 무언가 알고있음을 반영해주었지만, 엔도는 끝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엔도가 되었든 고엔지 본인이 되었든 언젠가는 말해주리라 믿었기에. 그런 신뢰가 있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합이 시작되고 나서,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날 시합 내내 고엔지가 보여주었던 태도는 단순한 '이상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필드가 혼란으로 가득 차있어, 내가 모르는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 시합날 그라운드 위에 엔도는 나오지 못했다. 두 사람이 없는 필드. 그래도 이 시합에 전력을 다해야해. 고엔지가 하지 못하는 만큼 그 빈 자리를 메꿔야만 해. 시합 초반 계속해서 같은 중얼거림을 되내였다. 필사적으로 달려 공을 쫓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후도 아키오의 등장과 함께 산산히 부숴져버렸다. 후도 아키오의 플레이는 예고도 없이 나를 옭죄어왔고, 결국 나는 고엔지를 신경쓰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시합종료 휘슬. 그리고 종결되어버린 그라운드 위의 흔적들. 결과는 큰 승리였지만 내 마음은 참패였다. 하루나의 성화에 못이겨 시큰 거리는 발목에 한번 더 파스를 뿌린 뒤, 나는 당장 고엔지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벤치에, 동료들의 무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좀 더 넓은 그라운드 한 켠. 내가 본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 깊이 허리숙여 인사하는 고엔지의 모습과, 그를 보며 웃는 엔도의 미소였다. 역시 엔도는 알고 있었나. 고엔지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무엇이 그토록이나 고엔지를 절망으로 몰아넣은 것인지. 틀림없이 엔도는 알고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알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나와 고엔지 사이에 놓인 거대한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한다고 내 머릿속 무언가가 외쳤다. 나는 짧게 호흡한 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뒤에 섰다. 승리를 축하한다는 유카의 애띤 목소리와 후쿠상의 기쁨섞인 격려의 말들이 내 귀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생각할 수 없었다. 고엔지의 등 뒤에 서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서, 그의 이름과 그의 혼란스러워하던 얼굴만이 공허한 허공에 남아 바보처럼 멤돌았다. 고엔지. 쉽게 부르던 이름마저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무언가 먹먹한 것이 꽉 들어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키도?"
결국,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왜 그러지?"
시선을 맞출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건 내가 아닌데. 이렇게나 쉽게 발견하고 이렇게나 쉽게 물을 수 있으면서, 왜 나는. 그리고 왜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키도. 잠깐 나 좀 ㅂ....."
"어째서지."
"뭐?"
나지막히 흘러나온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생각보다 싸늘하게 흘러나와 나조차도 놀라버리고 말았다. 고엔지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한 번 뱉어버린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주워담을 수 없다면, 제대로, 물어보는 수 밖에 없다.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좀 더 크게 소리쳤다.
"어째서냐, 고엔지!"
"어째서냐니.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어째서....! 너는 어째서....!! 대체 어째서냐!!"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키도! 좀 더 차분하게...."
"너는 어째서 아무 말도 해주질 않는거야!"
그래. 나는 그에게서ㅡ.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엔도가 보여주는 눈길을 나는 단 한순간도 고엔지에게 보내줄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짐을 끌어안고 있는지, 그가 헤쳐나가고자하는 가시밭길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혼란 속에서 어떤 결심으로 일어섰는지,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눈을 마주치면 서로의 행동을 읽을 수 있을정도로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고엔지를 지탱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대로, 그 역시 나의 지지점이 되어왔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르다. 분명히 달랐다. 내가 신뢰해왔던 연결점은 그가 생각하는 연결점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고엔지는 고엔지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키도."
"아니. 됐다."
그래서 나는 돌아섰다. 차갑게 식어가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아두지 않았다.
"그래. 고엔지 네 말대로다. 이건 너무.... 나 답지 않은 행동이었지. 사과한다. 내가ㅡ, 지나쳤다."
"키도....!"
"됐다고 했잖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엔지의 목소리 중 그 어디가 나를 그렇게 질척한 감정 속으로 몰아 넣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스스로가 너무도 혼란스럽고 또 마음이 무거워서 그 울분을 참지 못했을 뿐이다. 단지 그 뿐이었는데. 그것이 왜 이토록이나 분하고, 또 분한지.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감정으로 치부할만큼 단순한 것도 아니었고 그대로 가슴 속에 묻을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더 이상 그를 움켜쥘 수가 없었다. 하지만ㅡ,
"....아니. 난 아무 것도 되지 않았어."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니, 납득할 수 없게도. 고엔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비틀리듯 잡혀버린 손목에는 힘이 들어가있지 않아서, 나는 너무도 쉽게 고엔지의 손에 이끌리고 말았다. 그는 내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쥐고서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었다. 무엇에 끌려가고 있는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는 빠르게 움직였고 나는 엇갈리는 발걸음을 놀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어두운 복도. 그라운드를 벗어나 찾아간 경기장 복도에서 그는 있는 힘껏 나를 당겨 벽 앞에 세웠다. 그 검은 눈동자가 뚫어질 듯 뜨겁게 다가왔다. 등 뒤로 벽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엔지를 마주대했다.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도전하듯 달려오는 그의 시선 앞에 발가벗겨진듯한 기분으로 그저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네가 하고싶은 말이 뭔지 알겠어."
"......."
"네가 묻고싶은 것도, 뭔지 알겠다."
"......."
한 마디 한 마디의 목소리에 실린 무게가 무거웠다. 나는 무언가를 잘못한 어린아이처럼 반사적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고엔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비교적 확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대답해주지. 정 원한다면 말해주겠어."
"......."
"내가 왜 너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고엔지...."
"어째서 너에게 입다물고 있었는지가 그렇게 궁금하다는 거냐!!"
왜, 화를 내는걸까. 쏟아지듯 다가오는 그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다. 하천가에서, 제우스 중에게 패한 내게 라이몬으로 오라고 말하던 그 날 이후로 고엔지는 단 한번도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떤 고민과 어떤 태도 앞에서도 그는 나를 이해했고, 그리고 작게 웃었다. 하지만 오늘은 웃어주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어째서일까. 하지만 나는 쏟아지는 그의 울분 앞에서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엔지는.... 그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소리쳤다.
"왜냐하면!! 그건.....!"
* * *
[잠시 후 이 열차는 '하늘의 천황 스타디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모두 빠진 물건이 없으신지 확인하신 후.....]
울려나오는 방송에 눈을 떴다. 물끄러미 정면을 응시해오는 이시드 슈지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스쳐지나간 눈빛에는 익숙한 그리움과 낯선 날카로움이 동시에 담겨져있었다. 그런 나와 이시드 슈지를 번갈아 바라보는 엔도의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괜찮을거라 여겼는지, 엔도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까지의 시합과는 다르게 막연한 설레임보다는 긴장감이 열차 내부를 감돌았다. 이것이 세기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승전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무겁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긴장감을 세이도우잔 선수들만은 느끼지 못하는지 오히려 그들은 편안한 표정을 했다. 염려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한 얼굴이다. 어째서일까. 그런 표정이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역에 멈춰섰다. 바람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엔도가 가장 먼저 내리고, 그 뒤를 따라 매니저들과 아이들이 줄지어 내려섰다. 양측 선수단이 모두 열차에서 내릴때까지도 성제는. 아니, 고엔지는. 단 한번도 우리 쪽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선수단을 바라보며 눈대중으로 인원을 체크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히려 그의 곁에 서있던 토라마루나 사기누마는 엔도가 신경쓰이는지 몇번인가 힐끔거리는 눈길을 보내왔다. 사실은 그것이 좀 더 당연하고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제스쳐를, 고엔지는, 단 한번도 보내주지 않았다.
"키도. 가자."
엔도의 부름에 가까스로 걸음을 옮길 마음이 생긴다. 나는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서로 한 마디 말도 없는 고요한 승차장에 저마다의 시간이 담긴 발소리만이 울려퍼진다. 승차게이트를 빠져나오고 나자 양측 선수단 각자의 대기실로 이어지는 복도가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서로의 영역이다. 바로 여기서부터는, 그들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갈라져 이동하게 된다. 고엔지는 선수들과 토라마루를 먼저 앞으로 보내며 인원을 꼼꼼히 체크한 뒤 맨 마지막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모습을 두 눈에 담으면서도 일말의 움직임조차 보일 수 없었다. 서서히 멀어지는 고엔지의 뒷모습은 그대로 어둠 깊이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을, 뻗으면ㅡ. 닿을 수 있을까. 그는 내 목소리에 귀기울여 줄까. 우리는 어째서 같은 곳에, 함께 있을 수 없는 걸까.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함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키도...? 빨리 안오고 뭐해."
".....엔도."
"응? 왜 그래?"
".....미안하다, 엔도. 난 역시....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되겠어."
"키도?"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되겠어. 묻지 않으면 안되겠다. 반드시, 그를 붙잡고 물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하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마음에 새길 수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시합에 임할 수는 없다. 그럴수는.... 없었다. 그래서, 확인해봐야만 했다. 그러니까 반드시.
"금방 돌아올게. 정말 미안하다, 엔도. 잠깐이면... 아주 잠깐이면 된다."
"에!? 키도! 지금 어디가는...."
엔도의 목소리는 귀에 와닿지 않았다. 나는 고엔지가 사라진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분명한 무언가를 쫓고 있는건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그저, 발걸음이 옮겨지기에, 마음이 움직이기에, 길을 따라 걷고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쉽게 그를 따라잡았다. 내가 빠르게 따라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복도의 한 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 홀로 남아 분명하게 내 두 눈을 마주쳐온다. 나는 내 걸음을 천천히 달래며, 그의 몇 걸음 앞에 멈춰섰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붉은 두개의 동공은 쉴새 없이 떨리고 있으리라.
".....올거라고 생각했다. 키도 유우토."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도 이름을 부른 것은 그가 먼저였다. 그의 입에서 그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내 이름인데 이상하게 낯설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하게 부딪쳐온다. 그러나 기세좋게 그의 뒤를 따라온 것에 비해 나는 오히려 당당하지 못했다. 그의 앞에 석상처럼 굳은채,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혼란 속을 헤짚었다. 그에게서 나의 이름이 튀어나온 뒤에도 나는 망망한 대해(大海)를 헤매듯 같은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는 의아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내게 하고싶은 말이 뭐지?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일텐데."
"......고엔지."
힘겹게 내뱉은 한 마디는 결국 그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부를 곳이 없는 이름. 대답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이름. 아무 말도 없이 지난 2년간 사라져야 했던 그가 버려야만 했던 이름이었다. 그는 살짝 눈쌀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나는, 고엔지가 아니다. 내 이름은 이시드 슈지다."
".......어째....서....지."
나는 이시드 슈지다.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던 머릿속에 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그 말 한마디가 억누르고 억눌러왔던 무언가의 스위치를 건드렸다. 그 목소리는 기폭제가 되어, 절실하게 잠재워왔던 마음 속 무언가를 거세게 터트린다. 스스로가 인지할 수 없는 저 너머 어딘가에 묻어두었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고엔지의 면상 위로 쏟아졌다. 키도 유우토 답지 않은 일. 하지만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소리쳤다.
"어째서 네가 이시드 슈지인거야!"
".....?"
"어째서ㅡ! 어째서 네가.... 성제여야만 하는거냐!!"
".....고작 그걸 물어보려고 나를 뒤쫓아온건가."
"아니야! 너한텐 고작 그거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아니다! 네가.... 고엔지 네가 갑자기 사라진 뒤로... 우리들이 그 뒤로 얼마나.....!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헤매었는지 알기나해!! 고엔지! 넌 대체 어째서.....!"
엔도에게 들킬만큼 마음이 동요했던 이유. 이 결승전에 오기까지 심장 한 켠이 계속해서 무거웠던 이유. 성제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고글 속에 감춰진 눈동자가 흔들려야만 했던 이유. 왜 하필이면 지금. 왜 하필이면 이 장소에서. 그 모든 감정의 수원들이 터져나오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대꾸해오는 고엔지의 서늘함은, 이 모든 의아함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키도 유우토."
그는 나지막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것이 해답이었던 듯 나는 토해내던 울분을 멈춰세웠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한 단어 한 단어가 느리게, 그리고 깊게, 귓가로 흘러들어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어떤 시간을 겪어왔든,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
심장에 무언가가 몰아치듯 쾅하고 부딪친다.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싸늘한 것도 아니고, 어떤 감정을 담은 것도 아닌, 그저 덤덤한 고엔지의 눈빛이 가득히 담긴다. 손 끝이 떨렸다. 식어가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아무 것도, 없나? 너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일까? 하나의 공 앞에서 전력을 심으며 달려왔던 우리들의 시간은 정말 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걸까? 대답해 봐, 고엔지. 물을 수 없는 질문들이 입가를 맴돌다 사라진다.
....하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묻고싶었던 건 그런게 아니었다. 아이들의 장난같은, 편가르기 식의 물음과 해답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아니다. 고엔지가 선택한 길이 어떤 것이든지, 사실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왜 그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유카나 토라마루가, 사기누마가, 혹은 아후로디가 서있을 수 있는 이시드 슈지의 길 위에 어째서 나는, 나 키도 유우토는 서있을 수 없는지. 이전에 엔도에게는 주어지고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그 동일한 눈빛을 어째서 십년이나 지난 지금도 반복해야만 하는건지. 사실 내가 정말로 알고싶었던 해답은, 바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보는 것 밖에 없었다. 그저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서있었다. 그저 가만히 서서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고엔지와 나 사이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마주 선 채 한참이나 두 사람 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떨구어진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 않았기에, 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저 덤덤하고 그저 무신경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표정 앞에서 어떤 말들로 대답해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움에 더더욱, 해야 할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나의 침묵어린 행동 앞에서, 갑자기 고엔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하고싶은 말이 뭔지 알겠다."
"....?"
갑자기 되돌아온 그의 반응에,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짙은 얼굴 위에 겹쳐진 그림자는 너무나 두껍고 진한 것이어서 정확히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조금은 난감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들릴듯 말듯 새어나온 한숨과 함께 그의 두 눈 위에 떠올랐던 미묘한 변화 역시 사라져버린다. 그는 여태까지와 다르지 않은 덤덤하고 무신경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결국 넌 십년 전 그 날과 같은 질문을 하고싶은 거겠지."
십년 전.... 그 날....?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쓰고있는 고글 덕에 나의 표정이 그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대답해주지. 궁금하다면 말해주겠어."
그의 목소리가 뇌에 닿기도 전이었다. 무언가에 당겨지며 갑자기 끌려나간 탓에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며 발을 디뎠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지할 틈도 없이 등 뒤에 서늘한 무언가가 닿는다. 화들짝 놀라 들어올린 시선 앞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고엔지가 있었고,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쉽게 고글을 벗겨냈다. 단단히 붙들린 한 쪽 손목에서 아픔이 느껴지는 찰나, 고엔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벗겨진 고글이 바닥을 뒹굴었다. 양쪽 어깨가 그의 뜨거운 두 손바닥에 붙들려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그가 내 어깨를 붙잡고 있지 않았더라도 나는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낯선 흑안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두려움인지 불안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대답 또한ㅡ,"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닿는다.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파르르하게 떨리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십년 전 그 날과 같다."
기다란 여운이 남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천천히 멀어져간다. 느껴지지 않을만큼 멀찍이 떨어져간다. 숨소리가 사라지고, 어깨를 붙들었던 그의 손이 떨어져나간다. 망설임도 없고 혼란도 없는 덤덤한 발소리가 이어진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게서 돌아선다. 어둠 속에 가라앉은 복도 저편으로 긴 메아리를 울리며 멀어져간다.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소리를 잡아낼 수 없는 곳까지, 멀리ㅡ. 그리고 또 멀리ㅡ. 멀어져간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내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 곁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긴 허공, 작은 숨소리마저 울려퍼지는 공허한 공간. 나는 더 이상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어 그대로 주저앉았다.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지는 소리마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래.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붙들었던 온기만큼은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그가 흘리던 숨결은 틀림없이 이 곳에 있었다. 나는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목소리를 기억했다.
내 대답 또한 십년 전 그날과 같다.
십년 전 그 날. 결국 나는 그에게 무엇을 묻고 싶었던 걸까. 그의 무엇을 믿을 수 없어 그토록이나 애가 탔던 것일까. 사실은 알고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스스로의 욕심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허탈함인지, 아니면 그리움인지. 그 미소의 근원은 나조차도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뭐라....고....?"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엔지의 얼굴을 응시했다. 단단히 화가 나 있어 소리쳐 뱉어내긴 했어도 그의 얼굴 위에 후회함이나 거짓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심인가? 그가 내게 외치는 소리가, 그의 진심인건가...? 손이 떨렸다. 괜시리 주먹을 쥐었다폈다만 반복하며 그의 눈빛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도 않았고,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확고함이 가득 들어차있어 나는 아무런 말도 대꾸하지 못했다.
"믿기지 않는거냐? 그렇다면 한번 더 말해줄까!?"
"......"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내게 소리쳤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야! 말할 수 없었던 거다ㅡ!!"
울컥, 하며 무언가가 솟구쳐올랐다. 나는 그것들을 가까스로 삼켜내고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몇번이나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한 결과 나는 결국 그의 이름을 되내일 수 있었다.
"고....엔지..."
"감독님들께도 말할 수 있었어. 엔도에게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도저히 너에게 만큼은 말할 수가 없었어! 너만큼은....! 어떻게 해도 너에게 만큼은 말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나에게는 말할 수 없었지? 이 질문은 입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전달된 듯 했다. 나의 흔들리는 눈빛 너머에 감춰진 진심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몇 번이나... 오늘이 되기까지 몇 번이나....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말하는 게 키도 너를 위한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결국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패스해오는 네게, 이제 다시는 너와 같은 필드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다시는 함께 달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차마 내 입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런 말을 어떻게 내 입으로 하라는거야!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었던 거야."
고개숙인 고엔지의 목소리는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아, 점차적으로 그에게 실려있던 울분이 사라져갔다. 사죄하듯 읊조리는 그 목소리는 너무나 절실해서 나는 어쩐지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엔지는 마지막으로 그 한 마디를 남겼다. 아주 잠시동안 흐른 침묵을 타고, 그는 결심한 듯 두 눈을 들어 나를 마주보았다. 정말 미안하다 키도. 그의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그의 결심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위로? 사과? 아니면 감사의 말? 그 어느 것 하나 그에게 줄 대답에 맞지 않는 것이라 여겨졌다. 결국 잠시동안 망설이던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너무 늦지 않게 와라. 일상적인듯한 말을 남기며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져가는데, 고엔지가 사라져가는데도, 나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를 붙잡지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단지 홀로 남겨지고 나자, 어쩐지 다리에서 힘이 풀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허탈함인지 그리움인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맞대며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말할 수 없었던 거다. 그가 남겨준 하나의 해답이 메아리가 된 듯 끊임없이 귓가에서 울려퍼졌다.
우리들이 세계 제일을 노리고 있었을 때, 나는 굉장한 사람들과 함께 필드에 서있는 것이 무척 불안했었다. 저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이런 내가 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반복되기만 하는 고민들은 나 스스로를 점점 더 고립되게 만들었다. 앞서가는 사람들의 등은 너무나 멀고 너무나 눈이 부셔서, 내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캡틴의 모습도, 고엔지상의 모습도, 그리고 그 사람. 키도상의 모습도.
모두가 눈이 부셨지만 특히 그 사람은 더했다. 필드 위를 훑는 날카로운 눈빛과 쉬지않고 휘날리던 붉은 망토. 우리 팀의 골대를 지키는 것은 캡틴이었고 득점을 얻는 것은 고엔지상이었지만, 우리 팀의 시합을 이끌어가는 것은 언제나 키도상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면 팀 전체가 머뭇거리고 그가 역경을 뚫어내면 득점으로 이어졌다. 캡틴과 적으로 만나 같은 필드에 서기까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얼마나 많은 힘겨움이 있었는지 들을때마다 나는 더더욱 그를 동경해갔던 것 같다. 하지만 캡틴도, 그리고 키도상도. 달려가는 걸음걸음은 눈이 부셨다. 도저히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고 아름다워서 나는 차마 그들을 올곧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때문에 기묘한 우연이라고밖에는 정의할 수가 없었다. 키도상의 어깨가 그렇게나 작고 왜소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정말이지 기묘한 우연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건 한국전이 끝난 직후, 언제나처럼 히비키 감독과의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축구공을 옆에 끼고 터덜터덜 걷는 내 발걸음이 어느샌가 북적이는 도로를 지나 라이라이켄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 사람을 발견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라고 딱히 가게를 들리려 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길일 뿐이었고, 때문에 그 앞에 서서 간판 위를 돌려다보던 키도상과 마주친 건 우연한 한순간의 장면에 불과했다.
그는 무엇을 기억하는지 아니면 무엇을 추억하는지, 소리없는 눈빛으로 불꺼진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법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눈빛은 비록 고글에 가려 있었기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하고싶은 말들을 수많이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바로 옆까지 다가가도록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한참동안이나 그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토비타카?"
그가 나를 발견한 것은 바라보던 간판에서 눈을 떼고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언제부터 여기......"
"히비키 감독님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내가 간단히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침묵이 이어졌다. 이 이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혹은 무엇을 더 물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데 먹먹한 침묵이 어색했는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히비키 감독님과 매일 연습을 하고 있다 했던가. 그래서 이 시간에 가게 문이 닫혀있는거로군."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나의 짧은 대답만큼이나 짧은 웃음이 걸렸다. 잠시 바람이 스쳤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불꺼진 간판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부럽군."
잠시동안 그가 한 말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몇번이나 되짚으며 곰곰히 생각한 끝에 나는 뒤늦은 당황을 내비쳤다.
"......예?"
"엔도는 할아버지의 노트가 축구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넌 히비키 감독이 축구를 가르쳐주지. 하지만 나는......"
그가 말끝을 흐린다. 나는 대답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고글은 그의 진의를 알기 어려울만큼 얼굴을 단단히 가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표정에 묻어있는 나지막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쓸쓸해하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의 쓸쓸함인지 무엇으로부터의 아쉬움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는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쓸쓸함은 평소 키도 유우토라는 존재가 쉽게 내비쳐주지 않는 종류의 것들이어서 나는 정말이지 의외의 감정들을 겪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처음으로ㅡ,
그의 어깨가 너무나 작고 왜소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물었다. 딱히 생각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저 입 안에서 튀어나오는데로 그에게 질문했을 뿐이다.
".....필요한 겁니까? 의지할 곳이."
"음?"
그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놀란 표정을 짓고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고글 아래 눈빛이 놀라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데는 약했다. 워낙 말주변이 없는 나로서는 그에게 어떤 멋진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를 보낼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눈이부시던 존재가 이런 작은 아이였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다가온 탓도 있었지만, 가지런히 떨구어진 채 잔뜩 움켜쥔 그의 두 주먹을 외면할 수 없던 탓도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축구ㅡ, 하시겠습니까?"
"......토비타카?"
"이런 형편없는 실력의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캡틴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축구를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그가 원하는 그리움이 되어줄 수도 없고, 마음에 위로가 될 어떤 말들을 해 줄 수도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단지 같은 필드 위에서 그의 눈부신 공을 좇아가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는 잠시 쓴 웃음을 지으며 나를 응시했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였는지 나는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웃었고, 그리고 내게 말했다.
"넌 이미 우리 팀의 훌륭한 수비수고, 내가 의지하는 동료다. 절대로 형편없지 않아. 도전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렇다면 한 판 하시죠. 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내가 동경하던 빛과 같은 그라운드 위에 섰다. 몇번이나 그의 공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나는 단 한번도 그의 발치에 머문 공을 건드릴 수 없었다. 움직이는 발길위에는 간간히 혼란함이 묻어있었고 간간히 어려운 고민들이 묻어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공을 건드리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두 사람은 공을 좇아 달렸다. 터질것 같은 호흡이 밀려들어도 쉬지 않고 그라운드 위를 질주했다.
그는 즐거운 듯 웃었다. 나와 축구를 하는 내내, 내가 그의 발치를 향해 달려드는 시간동안에 줄곧, 그는 웃고있었다. 붉은 망토가 하늘을 휘날았다. 푸른 고글과 몇번이고 눈이 마주쳤다. 한 팀이 되어 등을 보고 있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필드 위에서 마주서니 그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의 눈빛, 그의 마음, 그의 생각이 조금씩 읽혀졌다. 비록 그의 공을 단 한번도 건드리지는 못했지만 나는 키도 유우토라는 존재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부신 존재. 그는 어느새 내 앞선 자리가 아니라 내 바로 옆 자리에서 달리고 있었다.
".....제게 더 많이ㅡ, 가르쳐주시겠습니까?"
흙먼지를 일으키던 발길이 멈추고 어느덧 필드 위로 석양이 내려앉았을 때, 나는 축구공을 사이에 두고 서서 그에게 말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말로 전하는데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인생을 살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 다시 그에게 말했다.
"저는 줄곧 굉장한 사람들과 함께 필드위에 있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저런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이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왜냐하면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앞선 사람들의 등이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너무나 눈이 부셔서."
".....지금의 난, 네게 있어서 앞서가는 자라는 말인가?"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였는데도 진심으로 반응해준다. 민망할 정도로 부끄러운 고백이었는데도 진지하게 들어준다. 그게 바로ㅡ, 키도 유우토. 내 눈 앞에 선, 그러나 같은 필드 위에 선 바로 이 사람의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짝 미소지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벌써 알고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알고있다니.... 무얼 말이지?"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있던 축구공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느리게 공을 들어올린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축구공 위로 옮겨왔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공을 내밀었다.
"축구ㅡ, 즐거우니까요."
그의 푸른 고글 안에서 당황함으로 놀란 적안이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났다. 나는 얼떨떨하게 멈춰선 그의 두 손 위로 가만히 축구공을 건네주었다. 작은 두 손 위에 작은 축구공이 자리잡는다. 그리고 나는 말없이 돌아섰다. 그라면 이해하리라 믿었다. 누구보다 지혜롭고 누구보다 생각이 많고 누구보다도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축구는 즐겁다. 물론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잘 하게 될 수도 있을테지만, 설령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축구는 즐거운 것이다. 같은 필드에서 달려주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옆에서 웃어주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즐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하고 싶었던 마음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 사람 역시 내가 전하려던 것을 정확히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천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는지 그는 두 손에 든 축구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는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후회없이 돌아섰다. 하늘이 붉었다. 너무나 눈이 부셔 바라볼 수 없었던 그 무언가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후련해진다. 즐거웠다. 그래. 축구ㅡ, 참으로 즐거운 것이로구나. 진심으로 즐거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웃으며 하천가를 빠져나왔다.
.
.
.
그리고 세월은 흘러 라이라이켄의 어느 저녁밤. 라이몬의 교복을 입은 세 명의 학생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학생들은 각자 라면 하나씩 주문한 뒤 제법 우울한 이야기를 나눴다.
ㅡ 키도 감독님의.....
.... 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라이몬인가. 나는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볶음밥 하나를 서비스로 내놓았다. 영문도 모른채 기뻐하던 아이들은 계속해서 연습의 어려움을 토로하다 가게를 나섰다. 캡틴이 라이몬의 감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키도상이 라이몬의 코치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리고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캡틴 때문에 키도상이 감독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사람은 오늘도 여전히 수많은 생각속에 휩싸여 자신에게서 사라진 그리움을 되짚고 있을까. 10년전에는 필드 위에 있던 모두가 그 사람의 작은 어깨에 의지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사실 따지고보면 반대로 그 사람이 우리들에게 더 깊이 의지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사실은 그 사람에게야 말로 그를 단단하게 붙들어줄 수 있는 의지점이 필요했던건 아닐까 그런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름대로 가장 자신있던 요리를 만들었다. 철가방에 조심스레 챙겨넣고, 식지 않도록 빠르게 달려 라이몬 중에 들어선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내게는 여전히 그의 등이 멀고, 그는 너무나 눈이 부시지만, 하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참견 한 그릇이 필요했었다는 걸 알고있기에. 그에게는 이런 참견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대답은 없었지만 나는 거침없는 웃음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의 놀란 표정과 마주섰다.
".....토비타카?"
예상했던 반응이다. 나는 대답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철가방 안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꺼냈다. 그의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다시 한 번 그의 왜소함을 만났다. 그는 여전히 작고 그는 여전히 왜소하고 그는 여전히 홀로 앉아 고민에 잠겨있다.